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신문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아! 나라의 흥망은 오로지 언로의 개폐에 달려 있는 것이어서 언로가 막히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정조의 이 말은 오늘날 되새겨도 가슴에 울린다. 그는 "꼴꾼과 나무꾼의 말도 가려 들으면 야언(野言)이 모두 상달되는데…신하들이 임금의 마음을 거스르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며 언로의 차단을 개탄했다.

그 전범은 중국의 요(堯)임금이다. 요는 큰 거리에 깃대를 세워놓고 정사를 비판할 사람은 그 아래 서 있으라고 했다(進善之旌). 충고를 듣기 위해서다. 또 궁 앞에 북을 두고 쓴소리를 할 사람은 치라고 했다(敢諫之鼓). 궁 앞 다리 기둥에는 판자를 세워 놓고, 왕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비방하는 글을 적으라고 했다(誹謗之木).

태종은 이를 본받아 신문고(申聞鼓)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곡절이 많았다. 우선 북을 치려면 대궐에 들어가야 했다. 정조 때는 우의정의 손자가 진정하러 몰래 들어갔다 잡혔다. 관리들이 처벌을 주청하자 정조는 "문단속이 너무 심해 대신가의 소원(訴寃)마저 막고 있다"며 입직 당상관을 파면하고 수문장졸을 곤장으로 다스린 적이 있다. 하물며 일반 백성들이야 오죽했으랴.

더군다나 북을 지키는 관리가 먼저 사유를 들어 보고 절차를 안 거쳤으면 처벌했다. 절차란 억울한 일이 있으면 수령과 감사에게 호소하고, 그래도 안 되면 사헌부, 그래도 안 되면 신문고를 치라는 것이다. 관리들이 신문고를 치러 가게 그냥 두었겠는가. 사헌부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신문고를 치다 도리어 무고죄로 몰려 귀양간 사람도 있었다.

세종 때 한 여종이 광화문에서 종을 쳤는데 승지를 시켜 알아보니 의금부 당직이 신문고를 못 치게 한 때문이라고 했다. 세종은 "호소 내용이 잘못됐으면 북을 친 사람을 처벌하면 되는데 왜 지레 신문고를 못 치게 했느냐"며 관계관을 파면했다. 그러나 현군만 있는 건 아니다. 관리들은 끊임없이 신문고의 폐해를 주장했다. 일부 왕은 이에 휘둘렸다. 세조 때는 폐지하기도 했다.

신문고 치기가 어려워지자 임금이 행차할 때 어가(御駕)를 가로막거나, 궁 앞에서 징을 치는 사람까지 생겼다. '격쟁(擊錚)'이다. 관리들이 이를 처벌하려 하자 명종은 "근래 관리들이 소원을 모두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무랐다.

현 정부가 기자실을 대부분 없애겠다고 한다. 기자들이 잘못하면 처벌하면 된다. 접근부터 막겠다니 비리가 드러날까 두려워 신문고를 헐뜯던 관리들의 심사와 무엇이 다르랴.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