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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형제·남편 잃고 자녀까지…|원폭에 「빼앗긴 인생」5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원폭피해자 이맹희할머니(67·서울충신동1의310).어떤 목적에서든 그의 지난 세월을 꼬치꼬치 묻는일은 오만이며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상처를 헤집는 얘기를 듣다보면 도대체 한 인간의 삶이 그의 것보다 더 철저히 망가지고 처절할수 있을까 참담한 기분에 빠져 든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의 피해를 본지 50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심한 화상을 당한듯한 어깨에서 썩은물이 줄줄 훌러내려 몸을 가누기 힘든 그에게 삶은 차라리「죽음보다 어둡고 무섭다」.
그는 암울했던 역사의 증거물인양 굴절된 역사의 상흔을 그대로 걸머지고 사는 사람이다.
45년8월6일 패권주의로 치달았던 일본에 투하된 원폭으로 그는 부모와 남편·형제들을 잃었고 그 후유증은 일생을 통해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으며 그의 아이들을 차례로 앗아갔다. 혹은 미쳐 거리를 방황하게 만들었다 .
최근 영세민 생활보호대상자로 근근이 끼니를 이으면서 미쳐 떠도는 막내딸의 약값을 대기위해 거리의 청소부로 나섰던 그는 지난달 18일 설상가상으로 자동차에 치여 어깨뼈가부서진채 간호해줄 사람 없이 병원에 「내팽개쳐껴」있다.
그가 할수있는 일은 이제「현실이 악몽」 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의 기구한 운명은 일제에의해 강제 징용당한 부모를 따라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시작됐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때때로속이 쓰리도록 맹물을 마셔가면서 11세때부터 병뚜껑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나라잃은 슬픔이 어떤 것이라는것을 깨닫지 못한 철부지였다.
그러나 히로시마의 쾌창한 날씨와 푸른 잔디밭이 유난히 돋보이던 45년 여름,하늘을 가르며 번쩍이던 섬광은 히로시마와 당시 20세로 피어오르던 그의 생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아침상을 치우던 임신 9개월의 어머니와 5세까리 동생은 그의 눈앞에서 .배가 터진채」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날부터 식구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미치광이가 돼버렸다.
어머니와 동생의 시신을 강물에 한줌재로 띄운 그는 식구들을 이끌고 광복이후 곧 시모노세키에서 밤배를 타고 한국의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그자신 얼굴·목·다리등이 진물러 터지는 원폭병의 징후에 시달리면서 생선장사로 온식구의 끼니를 해결해야했다.
그의 실성한 아버지는 제정신을 찾지 못한채 2년후 세상을 하직했고 역시 원폭병에 시달렸던 15세짜리 남동생, 12세까리 여동생도 시름시름앓다 차례로 죽어갔다.
18세의 나이에 철도 노무자와 결혼한 그는 역시 원폭의 후유증에 시달리며「술독에 빠져산」동갑내기 남편을 제처놓고 생선장사·원단보따리장사로 슬하의 7남매를 억척스럽게 키위나갔다.
「기구하게 짜인 운명」은 그러나 잠시도 그를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7남매중 딸하나는 낳은지 얼마 되지않아 죽어나갔고 네살박이 아들은 60년 4·19때 밖에서 놀다 총에 맞아 죽으면서 또 그를 실신시켰다.
후유증으로 사람 구실을 할수 없었던 그의 남편도 그와함께 산 서른 두해를 오로지 술만 마시다 50세 되던 해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원폭의 피해는 전형인양 그의 핏줄에 대물렴되어 그를 처절하게 짓 밟았다.
원폭의 후유증으로 코에 구멍이 뚫린 채 태어난 그의 큰아들·둘째딸은 미쳐서 집을 뛰처나간뒤 소식이 끊어졌고 마산에 사는 40대의 둘째 아들은 현재 거동을 못해 그의 며느리가 포장마차로 생계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
학교를 쉬엄쉬엄 다니면서늘 두통과 보기싫은 부스럼으로 애를 태웠던 그의 막내딸은 올해 꽃다운 26세의 처녀로 성장했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정신병이 수시로 찾아들어 난데없이 거리로 뛰쳐나가기 일쑤라는 것.
이씨 역시 알수 없는 온몸의 통증으로 47년째 진통제를 끊지 못하고 있다.
한때 포목장사로 돈읕 벌어 동대문시장안에 「왕벌직물」이라는 커다란 포목점읕 차러기도 했던 이씨는 사기도 당하고 자식들의 병원비로 재산을 날려 최근까지 여인숙을 전전해야 했다.
지금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마련해 준 5백만원짜리 전세방에서 정부가 주는 월4만여원의 돈으로 가까스로 입에풀칠을 하는 실정.
『정부에서 원폭피해자를 팔아 일본정부로부터 지난해 「17억엔을 받았으면 피해자들을 위해 써야할 것 아닙니까. 피해자들은 당장 육체적 고통과 생활고로 죽어가는데 어느세월에 그 돈으로 복지관을 짓겠다는 겁니까. 우선 살고 볼 일이지님 그는 지난 90년 6월11일 일본문화원 앞에서 「원폭피해자를 보상하라」는 전단을 뿌리며 농약으로 음독자살을 기도해 원폭피해자문제를 세상에 다시한번 일깨워주는데 앞장 서기도 했다.
『내 한몸 죽어 일본정부와 우리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고 피해자들이 조금이라도 배상을받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는 것.
그는 그이후로 뜻있는 국내외단체들의 초청을 받아 처참했던 「히로시마의 그날」 을 증언하는등 한국은 물론 일본의 매스컴을 타는 유명인이 돼버렸다.
이씨는 이제 원폭피해자 배상문제가 자신의 일만이 아니라 그늘진 역사의 뒤안에서 눈물칫는 1만여 피해자 가족의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그동안 피해자가족의 입장을 모아 각계에 전달하는 등의 노력을 쏟는 강인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지난해 원폭의 참상을 고발하는 연극에도 출연해 피해자들의 피맺힌 절규를 대변하기도 했다. 올해도 히로시마 원폭투하일인 지난 6일을 기해 일본단체의 초청을 받아 당시의 참상을 다시 한번 일깨울 예정이었으나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해 3개월간 외로운 병원신세를 지게됐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지난6일 이런 구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 위로하고 노고를 기렸다.< 고혜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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