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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 아빠랑 딸이랑 건축답사 그들의 특별한 7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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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 미술관은 우규승이라는 건축가가 설계했단다. 재료나 모양에서 최대한 자연과 어우러지도록 건축가가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지."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을 둘러보고 있는 건축평론가 이용재(左)씨와 딸 화영. [사진=김성룡 기자]

주말마다 자신이 모는 택시에 아내와 딸을 태워 건축 답사 기행을 다니는 남자가 있다. 지금 고1인 딸이 초등 4학년 때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7년째다. 절두산 순교성지, 경동교회, 주한 프랑스 대사관, 환기미술관, 대한성공회 성가수녀원 등 서울 시내는 물론 전남 담양 정토사 무량수전, 충남 예산 수덕사 대웅전, 충남 부여 정림사지 박물관 등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건축물에 얽힌 정치.사회.역사.예술.문화 등을 딸에게 가르치겠다는 아빠의 욕심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르지 않았다.

처음에 멋모르고 따라다니던 딸. 중학생이 되자 슬슬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빠의 열정은 지칠 줄 몰랐다. 기당미술관을 보러 제주도 가는 배를 탔을 때였다. 태풍을 만났다. 딸이 무섭다며 엉엉 울었다. "아빠, 돌아올 때는 비행기 타요." "안 됩니다. 인생은 험난한 거니 이 정도는 이겨내야지. 울음 그칠 때까지 계속 배 탈 겁니다." 돌아올 때 또 배를 탔다. "오늘 또 울면 다음번에 또 배 탈 거예요." 딸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스파르타식 교육'이 따로 없다.

이 별난 부녀는 건축평론가 이용재(47)씨와 딸 화영(16)이다. 건축잡지 기자였던 이씨는 건축가로 일하기도 했지만, "거친 건축판이 생리에 맞지 않아" 2002년부터 영업용 택시를 몰고 있다. 건축에 대한 글을 인터넷에 발표해 2003년 '좋은 물은 향기가 없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범상한 이력이 아니다.

역시 건축을 전공한 아내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들 부부는 결혼 당시 "아이를 낳으면 절대 공부를 강요하지 말고 대신 인문학적 소양을 탄탄히 갖춘 아이로 키우자"고 약속했다. 답사 여행은 그 실천이다.

"아이 교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비행 청소년을 만드는 책임은 아버지한테 있다고 봅니다. 아버지들은 주말이면 골프 치러 갈 생각 하지 말고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해요. 저라고 '만물박사'이겠습니까. 답사 떠나기 전 미리 아이에게 들려줄 내용을 공부합니다."

아이의 질문은 다양할뿐더러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온다. "아빠, 섭정이 뭐예요"(절두산 성지), "자유센터와 이승만 대통령이 무슨 관계지요?"(남산 자유센터), "워커힐호텔은 왜 조선호텔처럼 우리말로 이름을 짓지 않았어요?"(워커힐 힐탑바) 등등. 아이는 기억력도 좋다. "아빠, 리움미술관 갔을 때도 질투했잖아요. '외국 건축가들이 한국에 와서 다 해먹는다'고."(서울대미술관)

아빠가 딸에게 키워주고 싶은 '인문학적 소양'의 기초란 공자와 맹자다. '한음' 이덕형(1561~1613)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유교 분위기가 강했던 집안 영향 때문이다. 왜 공자와 맹자일까. "내 아이를 '선비'로 키워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공자는 '착하게 살자'고 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베풀고 살자고요. 이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아무래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인성교육'을 힘주어 말하는 아빠는 매일 공자님의 말씀이나 사자성어를 딸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로 날린다.

지금까지 부녀가 다녀온 곳은 글자 그대로 수백 군데. 한 번 갔던 곳을 다시 찾는 일도 여러 번이다. "아이의 나이에 따라 제가 해줄 수 있는 설명이 달라지거든요. 수덕사는 네 번이나 갔고, 병산서원.부석사 등을 즐겨 찾지요." 딸이 꼽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전북 고창에 있는 미당 시문학관. 아빠가 어떠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단다. "심플하네."

아빠의 교육열에 대한 딸의 반응이 궁금했다. "재미는 없지만 도움은 돼요." 단종과 수양대군 얘기처럼 아빠가 가르쳐준 내용이 수업시간에 나오면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단다.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그래요. 길 가다 구걸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빠는 그냥 못 지나치거든요."

이씨는 최근 딸과 돌아다닌 답사지 40군데를 소개한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멘토press)을 펴냈다. 갑신정변,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 제주 4.3항쟁 등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건축과 삶, 예술 등을 풀어나간 이 책을 읽다 보면 범상치 않은 아빠의 글발은 물론이요, '아빠가 자녀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게 크구나'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기선민 기자<murphy@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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