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15분…올해 10분벽 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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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바르셀로나 시간으로 8월9일 오후8시43분23초, 한국의 황영조(황영조)가 몬주익스타디움을 1위로 골인해 건국후 마라톤에서 첫 금메달을 따내는 순간으로부터 시계바늘을 49만바퀴 뒤로 돌린 36년8월9일 오후.
베를린스타디움에도 역시 24세의 조선청년 손기정(손기정)이 일장기를 단 울분속에 당시 세계신기록인 2시간29분19초의 기록과 함께 1위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로부터 반세기를 넘어선 56년만에 황영조의 쾌거는 한국마라톤이 거듭 태어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8월9일은 한국마라톤의 생일이자 길일로 영원히 기념되어질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날인 것이다. 한국마라톤이 걸어온 뒤안길은 영광과 치욕으로 점철된 파노라마의 연속이었다.
한국마라톤 최초의 공식기록은 지난 27년10월 마봉옥(마봉옥)이 세운 3시간29분37초.
이듬해 김은배(김은배)가 무려 32분2초를 앞당기며 2시간대의 문을 열었으며 이기록을 바탕으로 불세출의 기린아 손기정이 태어났다.
손기정은 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 당시 깨질 것같지 않았던 30분벽을 넘어선 세계신기록으로 전세계인을 놀라게 만들었지만 1년전인 35년4월 제1회조선마라톤에서 2시간25분14초로 우승과 함께 조선신기록을 세웠다.
손에 앞서 84년 LA올림픽에 김은배와 권태하(권태하)가 역시 일본선수단으로 참가했으나 각국선수에 대한 정보가 어두웠고 작전등이 뒤떨어져 각각 6위와 9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해방후 3년뒤인 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에 한국은 처음으로 태극기를 달고 국제무대에 나섰다.
마라톤에서 줄곧 선두를 달리던 최윤칠(최윤칠)은 골인지점 4km를 남기고 허벅지에 근육통이 일어나 기권, 애석하게도 정상의 문턱에서 주저앉아 분루를 삼켰다.
그러나 최는 52년 제15회 헬싱키올림픽에서 2시간26분36초를 마크하며 4위를 기록, 울분을 달랬다.
한국마라톤이 올림픽무대에서 각국의 견제를 마지막으로 받았던 때는 작년 제16회 멜버른올림픽에서 이창훈(이창훈)이 4위에 오른 것을 끝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한국은 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서윤복(서윤복)이 우승한데 이어 50년4월 역시 같은 대회에서 함기용(함기용)·송길윤(송길윤)·최윤칠이 나란히 1, 2, 3위를 차지해 한국마라톤의 위상을 드높였다.
부진을 거듭하던 한국마라톤은 65년5월 김복래(김복래)가 제19회 종합선수권대회에서 2시간20분19초를 기록, 당시 세계최고기록(2시간12분11초)에 8분8초차로 접근하며 10분대의 진입을 예고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후 매년 1분정도씩 한국최고기록을 단축했으나 74년3월 문흥주(문흥주)가 세운 2시간16분15초를 끝으로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거북이 걸음을 계속했다.
이후 10년간 「마의 15분대」가 형성됐으며 LA올림픽을 앞둔 84년3월 이홍렬(이홍렬)이 2시간14분59초를 기록하며 한국마라톤의 새장을 열었으나 세계기록은 이미 2시간8분대를 달리고 있었다.
마라톤왕국의 재건을 꿈꿔온 한국은 해외전지훈련과 과학적 훈련방법을 동원, 10분벽 진입을 꿈꿔오다 황영조·김완기(김완기)·김재룡(김재룡) 트로이카체제를 갖춘 끝에 끝내 이 벽을 돌파했으며 이 여세를 몰아 올림괵을 제패, 마침내 반세기 한국육상의 꿈을 이룬것이다.<장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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