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도올고함(孤喊)

대만인도 참석한 '5·18 항쟁'행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왼쪽부터 천진황 회장, 도올 기자, 장옌셴 관장, 주리시 한국학 교수.

19일 나는 대만에서 온 세 사람을 만났다. 한국통 저널리스트 주리시(朱立熙), 대만 국사관(國史館) 관장 장옌셴(張炎憲), 2.28사건 기념기금회 회장 천진황(陳錦煌) 3인은 광주 5.18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그들은 도대체 왜 왔을까?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

대만이라는 나라는 본시 남도어계(南島語系.Austronesian languages)의 폴리네시안 원주민이 살고 있던 곳으로 중국 역사의 장(場) 속에서 하등의 중국적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던 곳이 아니었다. 푸젠성(福建省)의 중국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명(明)나라 때. 그 후 대만의 역사는 식민지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1653년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도 이곳에서 왔다) 식민지를 거쳐, 만청(滿淸)제국 푸젠성 관할의 대만부가 되었다가, 또다시 시모노세키조약(1895)에 의해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자 우리와 같은 운명.

그런데 대만을 접수한 것은 국공(國共)분열시기의 부패한 국민당이었다. 대만성 행정장관으로 부임한 천이(陳儀)는 대만 사람들을 왜놈 황민화(皇民化) 교육을 받은 노예라 하여 동등한 중국인으로 취급하질 않았고 한없이 멸시하였다. 한편 그 나름대로 질서가 있었던 일본의 문민통치를 경험한 대만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부패한 국민당 잔당은 일본 식민통치자들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고 악랄했으며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권한을 독점한 독재자들이었다. 대륙에서 온 국민당 외성인(外省人)과 대만 본성인(本省人) 간의 일촉즉발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 되어갔다. 외제 담배를 팔던 노파를 세무 경찰이 총개머리로 으깨버린 참사를 계기로 폭발한 1947년 '2.28 사건'! 이 사건으로 자그마치 대만인 2만8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단수이(淡水)하가 피로 물들었다. 1949년 5월 19일 계엄령! 1987년 7월 15일 계엄령 해제에 이르기까지 38년간 85%에 달하는 대만 본성인들은 백색 테러의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다.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의 당선으로 대만인들은 대만이라는 국가의 토착적 아이덴티티의 회복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휘몰린 국민당은 다시 국공합작(國共合作)의 궁색한 노선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천 총통의 개인비리 등으로 실책이 거듭되자 국민당의 인기는 다시 올라갔다.

21세기 인류의 과제 중 하나가 중국의 성장에 수반해야 할 중국이라는 레바이아탄의 견제에 관한 것이다. 최근 골든로즈호의 침몰사건이 단적으로 예시하듯 중국의 도덕성을 무시하는 패권주의는 인류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대만의 존재는 중국을 건강하게 만드는 '몸의 가시'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도 민진당이 실각하면 종료되고, 대만은 또 하나의 퇴색한 홍콩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들은 말한다.

"대만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85%나 되는 대만 사람들의 정당한 인도주의적 요구가 좌절되는 것을 좌시할 수가 없지요. 우리는 한국이 부러워요. 5.18 민중항쟁의 정신으로 후퇴할 수 없는 민주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정신으로 2.28 사건의 분노와 함성을 되살리고, 민진당의 진실을 회복하고, 또 대다수의 갈망을 저버리는 국공합작의 비극을 막아내려고 합니다."

한.대의 일년 교역량은 200억 달러를 넘으며 증가 추세에 있다. 이 우방의 피눈물나는 노력을 생각하면서 우리 민족이 과연 5.18 항쟁의 정신을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깊은 반성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