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철마와 나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남북철도 시험운행이 비록 일회성 정치이벤트라고 할지라도 감동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음에 틀림없다. 분단의 길을 이었고, 금단구역을 밟았고, 남북한 사람들이 동승했고, 개활지로 나가는 교통로를 열었다.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행하는 장면이 남한인들에게 더욱 전율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기차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수백 명의 여객과 수백t의 화물을 싣고도 걷잡을 수 없이 달리는 쇠마차의 놀라운 질주력은 오래전부터 경외의 대상이었다. 기차가 달리면 도시가 만들어졌고, 상품이 넘쳐났다. 기차는 문명을 날라 주는 근대의 캐러밴이었다. 조선 말기 일본수신사로 파견되었던 김기수는 "화륜이 한번 구르면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뛰었다"고 시승기를 남길 정도였다. 그러므로 저 북행 기차가 북녘 사회에 어떤 회오리바람을 몰고 올 것인가에 고무되지 않을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러나 금강산역을 출발해 제진역까지 남행했던 동해선 기차는 깡총한 옷을 입은 북녘 사람들처럼 촌스러운 모습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혁명의 전사(戰士)들을 쏟아낸 그 기차가 이제는 남녘 사회에 쏟아낼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약속을 이행한다는 듯 남행 기차도 마지못해 남방 한계선을 넘었다. 북측 대표자인 권호웅 참사가 들뜬 남측 인사들에게 '소박하게 시작하자'고 싸늘하게 대했던 것도 시주(施主)로 연명해야 하는 낭패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경의선 북행 기차의 기세는 사뭇 다르다. 먼 훗날의 얘기일지라도 남한의 막강한 자본과 상품이 넘쳐 흘러갈 것이고, 시장제도와 자유주의 개념들이 개성을 통과해 평양과 신의주에 이를 것으로 보면 북행 기차가 일으킨 작은 진동은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하다.

나비의 날갯짓이 먼 곳에 폭풍을 일으킨다는 것이 요즘 한창 각광을 받고 있는 복잡계(複雜界)이론의 기본명제다. 한 곳에서 비롯된 작은 소동이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 상승작용을 타고 엄청난 변혁의 에너지로 진화한다는 것인데, 코레일 7435호의 시험운행은 두 개의 거대한 북풍을 숨긴 유혹적 날갯짓이다. 흔히 말하는 철의 실크로드는 '꿈의 북풍'이다. 정보화를 주도해 온 한국의 역동적 연성 파워를 신의주, 단둥, 중국 횡단철도를 거쳐 카자흐스탄과 모스크바로 흐르게 하는 21세기형 북방정책의 동맥이 구축되는 것이다. 이 원대한 프로젝트의 시조 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마 감격의 눈물깨나 흘렸을 것이다.

꿈의 북풍은 즐거운 담론의 소재인 데 반해 '대선 북풍'은 이미 경험한 바가 있어 긴장을 자아낸다. 가능성이 희박한 시나리오겠지만, 대선정국이 한창 무르익을 올 가을께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차 코레일 7435호를 타고 평양역으로 향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역에 마중 나와 예의 그 호방한 성격으로 원샷을 제의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것은 분명 '대선 폭풍'이 될 것인데, 여권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본심을 털어놓지 않은 채 자주 평양을 드나드는 모습이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한다. 여권에 스타 후보가 없는 현재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열린우리당에 즐비한 선거의 고수들은 평양행 기차를 9회 말 역전의 드라마로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