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구름위에서 마주친 '피카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2003 송년 콘서트를 하러 뉴질랜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나는 공항 서점에 들러 책 한권을 샀다. 요즘은 TV나 영화 따위의 잡다한 매체에 휘둘려 책 한권 읽기가 매우 힘들다. 나는 컴퓨터를 못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여행 기간에 맘먹고 책 한권 읽는 일은 어느새 버릇이 되었다

내가 구름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읽기 시작한 책은 '피카소와 함께 한 시간들'이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 책의 저자인 조르주 타마로는 아직도 살아 있다. 1946년 내가 막 돌지난 갓난아이일 때 저자는 31세로 프랑스 변방 공산당 기관지의 기자로서 그 지역에 휴가차 와있던 63세의 피카소를 만나 인터뷰한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장장 27년이나 이어진다.

그네들 기자와 화가 사이에는 어떤 예술이나 철학보다 공산당에 대한 신앙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이보다 더 철저한 공산주의 화가는 없다 싶을 정도로 '피카소와의 대화'에는 20세기 프랑스 공산사회주의 체제의 이상야릇한 향기가 배어 있어 나 같은 한국 독자에겐 시종 무시무시한 느낌을 준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빨강.적색.공산당 같은 단어를 함부로 입밖에 냈다간 큰일나는 괴상망측한 시절을 살아 왔다. 중.고교 때였던가 얼핏 피카소 할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얘기를 듣긴 했다. 어쩐지 그 즈음 미술 교과서에선 피카소의 그림이 슬그머니 없어지고 선생님들이 쉬쉬하는 걸 보면서 사태가 심각함을 대충 눈치챘었다. 그러면서도 어린 맘에 아하 피카소가 그랬다면 공산당에도 뭔가 좋은 게 있나 보구나 궁리도 해봤다.

내가 지금 공산당 얘기를 마구 지껄이다니 오늘의 세상은 과연 '화개장터'로구나! 하기야 그 때는 머리 똑똑하고 공부 좀 한 사람은 으레 그 쪽으로 빠진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 때였으니까. 피카소 영감도 쥘 만한 명성은 몽땅 거머쥐었겠다 한번 우쭐해서 공산당 어쩌구 저쩌구하다 제 풀에 그만둔 줄만 알았지, 그토록 죽는 순간까지 고집스러운 공산주의자였는지는 이 책을 펴들기까지 까맣게 몰랐다.

자! 지금부터가 내 얘기다. 내가 왜 '피카소와의 대화'를 빨간 밑줄까지 쳐가며 교정보듯 꼼꼼하게 읽었는가. 그만한 이유가 따로 있다. 한데 그 이유가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긴다.

나는 머리글을 읽으면서부터 우리 쪽의 한 인물을 피카소와 대비시켜 나갔다. 이중섭.이인성.박수근.김환기 같은 화가들이 아니다. 김선명이라는 이름의 할아버지다. 소위 비전향 장기수, 무려 43년의 독방 감옥살이 기네스북 기록 보유자다.

바로 얼마 전 나는 광화문 씨네 큐브 영화관을 찾아가 '선택'이라는 제목의 우리 영화를 봤다. 장기수의 애환을 그린 내용이었다. 나는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어떤 방법으로든 소문을 확 내볼까 했는데 '고양이를 부탁해' 때처럼 내가 무슨 죽살모(죽은 영화 살리는 모임) 전문가로 비춰질까봐 참았다. 나는 거기 주인공들이 하염없이 불쌍하고 미안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불과 며칠 차이로 나는 두 열혈 공산주의자를 한꺼번에 남태평양 상공에서 마주치게 된 거다. 나는 착잡했다. 어쩌면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면서 이토록 다른 형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쪽 사람은 43년의 편집광적인 독방 감옥살이, 아! 그걸 수발해낸 우리 대한민국도 만세다. 저쪽의 다른 한 사람은 독방은커녕 좁은 공간을 극도로 싫어해 대규모의 성을 몇채씩이나 사들이고 여러 부인을 거느리고 세계의 온갖 부자들과 예술을 빙자한 돈거래를 하며 부르주아의 극치를 구가한다. 金씨한테는 그나마 그의 고집에 머리가 숙여지지만 저쪽의 피씨한테는 왠지 치사하고 비겁한 느낌만 받게 된다.

그럼 나 조영남은 어느 쪽이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단연 피씨 쪽이다. 왜냐하면 나는 데모크라시스트도 아니고 코뮤니스트는 더더욱 아니고 그저 재미있게 살면 그만이라는 열혈 '재미이스트'이기 때문이다.

조영남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