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성] 절대왕정 무너뜨린 거리의 철학 禁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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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의 많은 대학생은 금서(禁書)로 세상을 이해했다. 상아탑의 교재로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당시의 목록을 돌아보면 '아! 옛날이여'가 절로 나올 만큼 세상은 달라졌으나 금서를 읽는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요, 용단이었다. 금서는 금지의 동의어다. 읽어선 안 된다는, 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 기준을 만든 건 이른바 기득권층이다. 자신들의 가치관과 어긋나는 이념이 담긴 책을 허용한다는 건 '잠재적 적'을 키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책과 혁명'은 금서의 영향력을 면밀하게 분석한 노작이다. 자유.평등.박애를 내세우며 서양사의 흐름을 크게 돌려놓았던 프랑스 혁명 직전에 읽힌 금서들을 조사했다. 저잣거리에서 많이 읽혔던 베스트셀러의 사회학을 해부한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의 폭넓은 시야와 엄밀한 분석이 주목된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유럽사를 강의하고 있는 로버트 단턴은 무려 25년간 이 분야에 매달렸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의 사회사.문화사를 금서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금서의 제작.유통.가격.종류.내용.기능.의미 등을 폭넓게 짚었다.

역사 시간에 배운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틀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 대표되는 자유 민권론이다. 인권은 군주가 아닌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며, 모든 인간은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사상으로, 루이 15세로 상징됐던 프랑스 전제왕정에 '피플 파워'를 보여주었다. 볼테르.디드로.몽테스키외 등 계몽주의 사상가가 즉각 떠오른다.

저자도 이점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접근법은 색다르다. 당시 일반인에게 많이 팔렸던 책은 현재 고전 반열에 오른 대사상가들의 책이 아니라 전제 정권의 눈을 피해가며 읽었던 대중 문학서라는 것이다.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할 정도로 완전히 잊혀진 책들이나 당시로선 장안의 지가를 높인 '히트 상품'이었다.

저자는 이 같은 베스트셀러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프랑스에 인접한 스위스에 있던 뇌샤텔 출판사(당시 금서를 냈던 프랑스 출판사들은 정부의 단속을 피해 파리 외곽에 둥지를 틀었다)의 다락방에 감춰진 5만여통의 편지와 여러권의 회계장부를 일일이 조사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서는 '2440년'이었다. 혁명 직전의 파리와 이후 7백여년이 지난 미래의 파리를 대비하며 부패했던 프랑스 절대왕정을 근엄하게 꼬집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 범죄와 감옥이 사라진 도시, 도덕의 학교가 된 극장, 소박한 장식으로 꾸며진 교회가 당시 파리의 모습과 1백80도 대비된다.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는 일종의 중상비방문이다. 뒤바리라는 창녀 출신의 여성을 내세워 색욕.물욕에 흠뻑 빠졌던 왕족.귀족.성직자를 비웃었다. 매춘이 성공의 비결로 통했던 당대의 문란한 성생활을 희화화했다. 자유롭고 분방한 성을 즐기는 여성을 그린 '계몽사상사 테레즈'는 여성도 독립적으로 쾌락의 주체가 되고 자기 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혁명적 감성을 표출했다.

금서들이 '철학서'란 이름으로 팔렸다는 점도 흥미롭다. 거리의 철학이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원동력이 된 것이다. 활자보다 영상이 득세하는 오늘이지만 변혁에 대한 욕망을 담은 문화의 힘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게 시대정신일 것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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