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산으로 모는 정치권 입김/심상복(평기자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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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를 가르는 기준의 하나로 「경제의 독립성」이 곧잘 거론된다. 후진국일수록 경제가 정치에 예속되는 정도가 심하며 선진국일수록 경제가 정치를 선도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을 놓고 볼때 우리의 경제현실은 지극히 후진적이다. 정치가 경제위에 군림하는 행태는 전에도 그랬지만 정치의 계절을 맞은 요즘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지는 느낌이다. 한마디 한다는 정치인들은 부쩍 경제현안에 큰 관심을 표명하며 정책당국에 이런 저런 요구를 한다.
○늘어나는 인기성 주문
물론 경제는 경제전문가들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때로는 한걸음 떨어져 내리는 진단이 더 정확할 수 있으며 비전문가들이 내는 아이디어가 문제해결의 열쇠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누구든지 나라경제에 보탬이 되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만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인사일수록 말이 「천금같아야」하며 특히 경제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는 삼가야 한다.
그러나 요즘 정치권에서는 예상되는 부작용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거나 아예 외면한채 대안아닌 대안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경제를 정치 인기얻는 수단정도로 여기는 탓이다.
정책당국이나 한국개발연구원(KDI) 같은 연구기관에서 경제체질을 강화하기 위해 통화긴축 기조를 더 끌고나가야 한다는 입장인데도 민자당쪽에서 한은재할인율 인하문제를 들먹거리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은의 고유업무인 재할인율 조정문제를 당사자와는 한마디 사전논의 없이 들고 나온 것도 잘못된 일이지만 재할인율 인하가 지금 경제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제대로 짚어나 보고 이같이 발언했는지 궁금하다.
○고유업무까지 침해
재할금리 인하는 마음만 먹으면 되겠지만 이것과 문제의 핵심인 실세금리 하락과는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자금수요를 촉발시켜 시장금리 상승을 초래할 수도 있다. 기업부담 완화라는 표적에는 근접하지 못하고 돈흐름만 왜곡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정치권은 강력한 행정지도를 펴서라도 대출금리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은행원들에겐 공허하게 들린다. 은행금리가 실세금리는 고사하고 단자회사 등 다른 금융기관의 금리보다 훨씬 낮은 현실에서 은행금리만 끌어 내린다고 해결될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은행을 다그치기만 하면 금리가 떨어지고 기업부담이 줄어든다면 고금리란 말은 일찍이 사라졌어야 했다.
역시 금리를 잡으려면 「경제의 거품」을 걷어 내는 고통스런 작업을 계속하는 길 밖에 없다. 최근의 금리안정화 추세도 인플레에 의존하는 실속 없는 성장은 지양하겠다는 정책의지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모처럼 안정의지를 갖고 통화정책을 펴는 당국에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는 주문이 너무 많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금리자유화를 앞당긴다는 방침이 대체로 섰으나 선거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이를 유보하자는 정치권의 주장이나 88년 대통령 선거때 제시됐던 광주·인천·대전에 중소기업 전담은행 설립문제가 재론되는 것도 마찬가지 얘기다.
당시 이 공약에 따라 출범한 대동은행(대구)과 동남은행(부산)의 성과가 솔직히 말해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은행만 들어서면 지방자금사정이 확 풀릴 것이라는 기대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는 올들어 대구와 부산지역 어음부도율이 전국 평균치의 여섯배 수준에 있는 사실이 잘 대변한다.
은행장들을 불러 중소기업에 담보 없이 돈 좀 대주라고 독촉하지만 대출해준 기업이 쓰러지면 부실채권이 늘었다고 문책운운 하니 은행원인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각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근로자를 위한다는 명분에서 대통령이 약속한 사안이기 때문에 설립된 평화은행도 자본금 공모가 안돼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는 현실을 정치권과 책임있는 당국자들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산은이사장에 5공 실세였던 권정달씨가 임명되고 치안본부장을 지낸 인사가 중소기업은행 이사장에,전법무장관이 주택은행 이사장에 앉아 있는 것도 금융을 정치의 부산물쯤으로 여기는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금융경제에 대한 이같이 낮은 의식수준은 지난달 정보사땅 사기사건을 마무리짓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구시대 사고 버려야
주범인 김영호씨가 국방부 군무원으로 재직중에 벌인 일인데도 국방부 책임자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않고 금융기관 관계자들만 무더기로 징계한 것이다.
은행을 「무주공산」으로 만들어 놓고 한마디 지시로 금융을 좌우하려는 구시대적 사고는 경제에 골병만 더한다는 점을 정치권의 「높은」인사들은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의 선거를 겨냥해 생색나는 것은 정치권이 챙기고 그로 인한 후유증은 「아래쪽」에서 책임지라는 식은 이젠 정말 사라져야 할때다.<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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