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섭리를 끈질기게 묻는 감독 - 이창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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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10면

영화 ‘밀양’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 닥쳤을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그냥 도망쳐버릴까,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발악을 해볼까, 그도 아니라면 절망의 끝까지 더욱더 떨어져버릴까. 어차피 정답은 없다. 쉽게 답이 찾아질 수 있다면 그런 절망조차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제공 파인하우스필름

이창동 감독의 네 번째 영화 ‘밀양’은 신애(전도연 분)라는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남편을 잃고 아이와 함께 밀양으로 왔다가 다시 아이까지 잃어버린 여자. 그녀를 지켜보는, 적당히 속물적인 남자 종찬(송강호 분). 어떻게 보면 ‘밀양’은 절망에 빠진 여자를 지켜보는 남자의 이야기다. 언제나 그녀를 받아주고, 언제나 그녀를 위해 웃어주는 한 남자의 시선.

하지만 그녀는 그 시선을 받아줄 여유가 없다. 세상은 너무 가혹하고, 신이 있다면 아마도 벌이나 시험을 내리는 것일 게다. 편파적이라고 느낄 만큼 가혹한 벌을.
 
비밀의 빛, 밀양(密陽)

‘밀양’은 사랑 이야기일 수 있지만, 세속적인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처음 밀양으로 온 신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밀양’의 뜻을 말한다. ‘비밀의 빛.’ 그것은 제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테마로 직결된다.

이창동이 관심 있는 것은 지고지순한 사랑이나 애절한 슬픔 같은 것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인간의 혼돈스러운 내면이다. 선과 악이 뒤엉켜 놀아나고, 애정과 분노가 서로를 위로해주는 진기한 내면의 풍경.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당연히 존재하는 내면이지만, 그걸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더욱 처절한 조건이 필요하다.

‘밀양’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처음은 남편을 잃고 아이와 함께 밀양에서 살아가는 신애의 모습이다. “불행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신애의 얼굴은, 불행해 보인다. 아이는 아빠를 그리워하지만, 신애의 마음은 모호하다. 죽기 이전에 이미 남편은 그녀를 버렸지만, 신애는 인정할 수 없다. 그녀가 밀양으로 온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결코 돌아선 사이가 아니었다고 증명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그저 자신에게라도.
그런 신애에게서, 신은 가혹하게도 아이를 뺏어간다. 두 번째 부분은 아이를 잃고 절망에 빠진 신애가 종교에 귀의하는 이야기다. 울 기력조차 없었던 신애는 우연히 부흥회에 갔다가 통곡을 하고 모든 것이 평화로워진다. 슬픔과 절망조차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신애는 종교생활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평온해지기 위해선 아이의 유괴범을 용서해야만 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은 지루하지만, ‘밀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이야기가 아니라 영상과 주제만을 말하는 것으로는 ‘밀양’에 대해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밀양’은 문학적인 영화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밀양’에 담겨진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 대사 하나와 소품 하나, 인물의 동선과 버릇, 그리고 소사(小史)까지 세세히 들여다보아야 ‘밀양’의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너무 꼼꼼해서 숨이 막힐 정도다.

‘밀양’은 눈으로 보는 세계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을 이해해야 들어갈 수 있는 세계다.

견뎌내야만 하는 절망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신애는 유괴범을 직접 보고 용서하겠다면서 면회를 간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받은 유괴범을 본다. 과거를 뉘우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용서받고 평온해진 유괴범을.

‘밀양’의 마지막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어차피 용서하려 했던 유괴범이 이미 용서받았다면 좋은 일 아닐까? 신애가 원했던 것도 결국은 용서였으니까.
하지만 신애가 원한 것은, 자신이 그를 용서하는 의식이었다. 자신이 원수를 용서할 정도로 마음을 정리했고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였음을, 자신에게 각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틀어졌다. 그녀는 원초적인 분노에 휩싸인다. 나는 이토록 괴로워하는데, 어째서 유괴범이 저토록 평온할 수 있는가. 신애는 유괴범을 증오하고, 하나님을 힐난한다. 어째서 나에게 고통을 준 악인에게 모든 것을 용서하고 천국을 약속할 수 있는지를. 그래서 신애는 반항한다. 물건을 훔치고, 장로의 남편을 유혹하고, 자해를 한다. 이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정말로 보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렇게 그녀는 무너져간다.

‘밀양’은 종교를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창동은 종교적인 구원에 대해, 신 혹은 세상의 섭리에 대해 완강하고도 끈질기게 이야기한다. 운명처럼, 누군가에게 절망이 찾아온다.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없다.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야만 한다.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망치거나 뭔가에 의지한다고 해서 고통과 절망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뭔가 이 세계의 비밀이 있다.

‘밀양’이란, 실재하는 소도시인 동시에 세계의 비의(秘意)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신은 결코 눈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쉽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의 빛인 것이다. 이창동은 ‘밀양’에서 그 빛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주지 않지만, 그 빛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를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LIFE STORY

이창동씨는 『녹천에는 똥이 많다』의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영화감독이다. 2003∼2004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일할 때, 창작과 행정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분야를 오가며 폭넓은 역량을 보였다. 그가 각본을 맡은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영화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가 감독한 세 작품 또한 흥행과 평단의 지지를 받았다. 청룡영화상 감독상, 대종상영화제 감독상ㆍ각본상, 2002년에는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FILMOGRAPHY

초록 물고기(1997년)
주연
한석규·심혜진·문성근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사랑은 꽃핀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탄 막동(한석규 분)은 미애(심혜진 분)를 우연히 만난다.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던 막동이는 조직폭력배 배태곤(문성근 분)의 밑에 들어가 일하게 되고,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부르던 미애와 다시 만난다.

박하사탕(1999년)
주연
설경구·문소리·김여진
광주사태를 겪고, 고문 경찰로 피폐해져 가는 한 남자의 삶을 시간의 역방향으로 회상해 간다. 1980∼90년대의 청장년 시절을 보여주는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20년을 압축한다. 폭력의 피해자였던 순박한 청년 영호(설경구 분)는 세월이 흘러가며 가해자로 변모해 간다.

오아시스(2002년)
주연
설경구·문소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족까지 외면하는 전과자 청년 종두(설경구 분)와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인 공주(문소리 분)의 사랑 이야기. 남들의 눈에는 상종 못할 전과자가 말 못하는 장애인을 성폭행한 사건으로 보일 만큼 이상한 관계지만, 둘은 사랑을 싹 틔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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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씨는 영화만화애니메이션게임음악 등 대중문화 전반을 투시하는 전방위 평론가로 ‘B딱하게 보기’를 무기로 한 ‘봉석 코드’의 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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