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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인 처자 핑계대 승선권 빼내|7백불에서 만불까지 받고 팔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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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당시 한국대사관 직원이던 A씨는 『그 일때문에 80년대들어 「뒤늦게나마 청와대에 비리를 진정하자」사람까지 있었다. 한국의 수송함 두척은 75년4월26일 오후에 출발했는데, 그 직전인 25일밤에 리번이 대량 암거래된 것으로 안다. 적게는 7백달러, 많게는 1만달러가 오갔고, 달러 대신 금괴로 거래된 사례도 많다고 들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 돈많은 월남인이라면 가격의 고하를 따질 형편이었겠는가』고 기자에게 말했다.
역시 한국인 교민회장 출신인 B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B씨는 당시 LST에 승선, 5월13일 무사히 부산에 도착해 국내에 정착했다.

<"난민피난 돕겠다">
『통상 1인당 1천달러에 리번이 거래된 것으로 압니다. 물론 나는 엄연한 한국인이니 무료승선이였고요. 배안에서 대만인 친구를 만났어요. 월남에서 잘알고 자내던 사이였습니다. l천달러를 한 한국인에게주고 리번을 얻었다고 말하더군요. 또 순수월남인인 교사 일가족도 만났습니다. 그들도 역시 돈으로 승선자격을 샀다고해요. 아무리 돈이 최고라지만 이 판국에 과연 이래도 되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5년4월9일 한국의 부산항을 떠난 두척의 LST(815함과 810함)는 당초의 주임무가 월남난민수송과 구호품전달이었다. 이때만 해도 불과 20여일뒤에 월남이 망하리라고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배가 월남땅에 점차 까워질수록 전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주월 한국대사관은 이들 함정을 유사시 한국교민을 탈출시키는데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김영관대사는 이같은 우리의 계획을 알리 없는 월남정부 고위관계자를 만나 『사이공에 구호물자를 내려 놓은뒤 당신네 난민과 함께 우리 한국인난민도 안전지대로 피난시키겠다』고 설득, 응낙을 받아냈다.
월남전역의 공산화가 확실시되지 않은 당시 시점에서 「안전지대」는 월남땅 남서쪽 끝에 있는 푸쿠옥섬이었다. 이 곳은 베트콩 점령지역에서 피난온 난민들의 피난처로 미리 예정돼 있었다.

<자기몸만 빼내려>
일종의 기민작전 덕분에 한국교민 3백여명은 우리 해군의 8l5힘에 무사히 오를수 있었다. 총 l천3백35명이 승선한 이 배는 푸쿠옥섬에 일단들렀다가 재차 부산항으로 향했다. 무게는 이 배에 타고 있던 한국교민(3백14명)과 이들의 월남인 부인·자녀(6백59명)외에 나머지 3백62명의 순수한(?) 월남인·대만인·필리핀인들이 어떤 경로로 배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또 한척의 배인 810함에 탔던 1천2백여명의 월남난민은 당초 월남정부와의 약속대로 푸쿠옥섬에 내려졌고, 815함의 인원 절반가량이 이 배에 옮겨타고 함께 부산으로 떠났다).
『표면상 푸쿠옥섬에 가는 것으로 하고 한국인끼리 쉬쉬하며 고국행 배(815함)에 올랐기 때문에 상당수 교민2세들도 아버지의 나라로 탈출할 기회를 놓쳤지요. 그런데 우리와 아무 연고가 없는 외국인들이 귀신같이 배를 탔고, 바로 이 부분에 흑막이 있는 겁니다. 승선권 판매에는 몇몇 파월근로자들도 가세했어요. 자기들의 월남인 부인이나 자식이름으로, 그것도 인원수를 적당히 부풀려 리번을 타내 엉뚱한 사람들에게 팔아넘긴 것이지요. 자기 몸 하나는 살짝 한국으로 빠져나오고….』(전교민회장 B씨)
우리 해군함정 두척이 사이공을 떠난지 사흘후인 75년4월29일, 글자 그대로 피말리는 상황속에서 한국공관원들은 탈출에 성공한 쪽과 그렇지 못한쪽으로 나뉘었다. 한쪽에는 고국에서의 불명예가, 또 한쪽에는 적지에서의 기나긴 시련이 각각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와대에서는 박대통령 이하 관계자 전원이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미국항공모함(핸코크로)으로 가까스로 탈출한 김영관대사로부터 전문이 날아왔어요. 「본직 이하 공관원 전원이 임무를마치고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음」이라는 내용이었지요. 다들 환호했습니다. 그런데…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대통령께서 매우 실망하시더군요.』(김정렴당시청와대비서실장)
17년이 흐른 지금, 베트남은 우리에게 다시금 낯설지 않은땅이 되어가고 있다. 75년 그곳을 탈출했던 많은 국내 월남인들도 최근 고향을 임의로 다녀오고 있었다.

<"잊기 힘든 몹쓸짓">
취재중 만난 한 월남인은 『공산화된 조국이나마 우리는 이제 고향에 다녀올 수 있으니 한국의 이산가족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한때였을지라도 월남전 당시 몇몇 「어글리 코리안」들이 저지른 「몹쓸 짓」들을 국내의 적지 않은 베트남인들은 기억속에 감춰두고 있었다. 서울에서 파출부로 생계를 잇고 있는 베트남여인 H씨(54)는 통역을 가운데 두고 인터뷰한 자리에서 자신이 굳이 「한국어를 배우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68년도에 한국인파월기술자 문씨를 만나 사랑하게 됐다. 함께 살았다. 나는 당시 거액인 1만2천달러를 그에게 주었다. 75년 패망때 그는 이란으로 일자리를 구해 떠났다. 공산정부가 국외탈출을 묵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이란으로 가려했다. 그러나 한국인 3명이 보증을 서야 서류요건이 갖춰지는데, 한국인모임에서는 1인당 2백50달러씩 7백50달러를 사례비로 내라고 요구했다. 그 돈이 없어 2년을 지체했다. 어느날 「안」이라는 좋은 한국인이 내 사연을듣고 동료들에게 화를 내며 보증서류를 구비해 주었다. 그 덕에 77년5월5일 이란에 갈수있었다. 79년에는 문씨를 따라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에게는 뜻밖에도 본부인이 있었다. 그는 내가 준 돈(1만2천달러)으로 서울 불광동에 집을 사놓고 아들명의로 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그와 헤어지게 되고, 돈 일부라도 찾으려고 여기저기 진정했으나 한국인들에게 호통만 들었다. 그래서 내가 불편하더라도 한국말을 절대 배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말을 배워 의사소통을 하게되면 또 속을 것 같았다….』 <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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