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제세 그룹대표 이창우씨|"다신 사업할 뜻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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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70년대 중반, 제세 신화를 창조하고 「하루아침」에 몰락한뒤 세인의 이목에서 사라졌던 이창우 전 제세그룹대표(46).
『사업으로 세계를 재패하겠다』며 펄펄 뛰던 30대초반의 「무서운 아이」에서 50을 바라보는 중년남성으로 변해버린 그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진지 10여년만에 처음으로 「조용한 외출」을 시도하고 있다.
「먼 훗날 후세들에게 살기좋은 사회를 남겨주기위한 연구작업을 위해」 재기의 기지개를 펴고 있는 그의 의지가 담긴 사업의 주체는 「한백연구재단」.
이씨를 이사장으로 지난 23일 창립 이사회를 마친 이 비영리공익재단에는 눈에 익는 정치·경제·언론·학계사람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어 활동이 본격화되면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74년 자본금 1천만원으로 시작, 불과 4년만에 제세산업·제세건설·제세섬유등 6개기업을 거느린 「신흥재벌」로 떠올랐던 이씨는 곧 연이은 부도와 외환관리법위반등의 혐의로 l0개월에 걸친 수감생활을 하는등 한때 재계에 큰 충격을 몰고 온 장본인.
그리고 출감후인 81년말에는 자신의 화려한 부상과 처참한 몰락에 얽힌 갖가지 사회상, 재·정계 거물들의 요지경 백태를 육두문자를 섞어 휘갈긴책 『옛날 옛날 한옛날』을 출간해 숱한 화제를 몰고 온 「파란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준비과정을 거쳐 오는 9월중 개소식과 함께 출범할 「한백연구재단」은 아직은 「젊고 아까운」이씨가 하루속히 재기해야한다는데 뜻을 같이한 지기·선후배들이 기금을 모아 마련한 것이라는게 주위의 전언.
그를 아끼는 한 기업체 사장이 『편하게 사용하라』며 빌려준 서울 평창동 산마루에 위치한(평창동411의10) 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씨는 옛날 모습 그대로라는 기분을 주었다. 늙으나 젊으나 별 차이가 나지않을 것같은 텁텁한 얼굴탓도 있겠으나 구리빛 건강이 넘쳐보이는 그에게 10여년전의 시련이 남긴 흔적은 보이지 않는듯했다.
『제세 4년은 내게 어떻게 살아아한다는 교훈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회문제가 돈으로 다 해결된다는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가르침을 일깨워주었어요. 80년대를 오욕의 기업인으로 살아야했을 연결고리를 일찍 끊어준 것같아 오히려 고맙기도 합니다.』 그는 「신화창조의 주인공」이 「쇠고랑찬 죄인」으로 곤두박질한 좌절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하는 타인의 우려를 「별것아니었던 것」처럼 시큰둥하게 얘기했다.
『나는 당시 우리주변의 각박함, 도덕적 타락등이 가난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돈을 열심히 벌어 경제에 기여하는 것도 한 몫이라 생각해 사업에 매진했었습니다. 사업에서 손을 턴 이후 지금까지 「모두가 진정으로 잘 사는 미래」를 생각하고 연구하는데 모든 시간을 썼습니다.』 그는 당시 30여만부나 「날개 돋친듯」 팔려나간 『옛날 옛날 한옛날』 출간으로 세상을 다시 한번 소란스럽게 한 이후 84년 일본 동경대학원 연구원으로 한국을 떠났었다.
애초 돈보다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추구한 사람이 왜 상당액을 해외로 빼돌린 혐의로 수감돼야 했느냐는 질문에 시종일관 인터뷰를 피하던 그는 비로소 목소리에 감정을 실는듯했다.
『나는 그걸 「권력의 의지탓」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옛날…」에서도 한가지만은 얘기 안한다고 했습니다. 그냥 내가 쉽게 얘기해왔던대로 능력부족이라고 돌립시다.』 그는 그러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당시 입장을 설명하려 했다.
또 『옛날…』은 당시 꼬마였던 두딸이 성장한 이후 「아버지의 옛날을 제대로 알게하기위해」, 또 자신을 아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파렴치한을 도왔다」는 자괴감을 덜어주기 위해 썼다는 것이 그의 설명.
『동경유학은 당시 갖가지 제약으로 맘놓고 접할수 없었던책, 사고와 생각을 섭렴할 수있어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의 3년동안 국제문제 관련 공부에 땀을 쏟았고 진정으로 가치있는 일이 무엇인가틀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그의 사무실에 꽂혀있는 책들도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동안 그는 아사히 신문에 일본인의 섬나라 근성을 비판하는 글 「한·일 신시대의 일본의 길」을 기고해 당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는 객관적인 눈으로는 분명 엄청난 시련의 시기였을 이당시 보여준 아내의 내조에 대해 『고마움이상의 것, 즉 행운이나 경건한 것으로 아직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당시 제세의 존재는 성장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늘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그에게 보상없는 도움을 주려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자신의 강한 투지등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시인한다.
당시 그와 함께 「무서운 아이들」로 불렸던 그의 경기고와 서울대공대 기계과 동기·선후배들은 사업가로서 그가다시 한번 일어설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장사에는 이제 전혀 뜻이 없다』고 잘라말했다.
「거지에서 정치인까지 늘 그의 주위에는 사람이 붐빈다」는 얘기를 듣는 이씨는 종일 책을 읽는 일 외에도 그의 사무실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과 소줏잔을 나누기도 한다.
국회의원 이부영·유인태씨등이 낀 8명이 어울려 매주토요일 북한산에 오르는 것도 그의 정해진 일과중의 하나로돼 있다. 그는 무슨 돈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일을 벌이는가라는 질문에 『내돈을 여러사람에게 맡겨놓았다는 기분으로 주위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고있다』면서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일부 기업에 경영고문을 해주고 얼마간의 생활비는 마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오는 10월 재단이름으로 종합정보연감인 『브레인』을 처음 출간할 그는 앞으로 연구·조사사업·출판·세미나·토론회등으로 분주해질 재단일에 뜻을 보이는 사람은 모두 받아 손잡고 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민적 합의에 의한 희망이 무엇인가를 과학적 방법으로 조사, 밝혀내 이 희망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그는 장인이 마련해준 서울불광동 35평짜리 미성아파트에서 부인·두딸(고1·중1)과 함께 살고 있다.<고혜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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