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여성 宗員' 인정 대법원 공개변론 지상중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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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의 반란’으로 불린 소송을 둘러싸고 대법원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18일 대법원에선 사상 처음으로 공개 변론이 열렸다. 최근 대법원은 그동안 서류심리만으로 판결한 것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재판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법정 다툼은 결혼해 출가한 여성에게도 ‘종중 회원(宗員)’ 자격을 인정하느냐를 놓고 전개됐다. 최종 판결에 따라 여성의 지위와 대우 및 종중과 관련해 수백년간 내려온 관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번 재판은 여성계·학계·언론 등의 주목을 받아 왔다.

# 숨죽인 법정

이날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뒷편에 있는 대법정. 변론시간이 다가오면서 방청객들이 속속 입장했다. 대법원은 홈페이지 등을 통해 방청권 신청서를 접수받아 이 중 1백30명에 배부했다.

이해관계가 다른 탓인지 방청석 곳곳에선 여성들과 남성들이 따로 무리지어 앉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특히 원고측은 변호인 등이 모두 여성들로, 피고측은 남성들이어서 대조적이었다. 첫 공개 변론인데다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인지 경비원들이 곳곳에 배치됐고, 방청객들도 말을 아끼는 듯 했다.

이번 소송을 제기한 원고는 용인 이(李)씨 사맹공파의 여성 5명이다. 이들은 종중이 지난 1999년 3월 임야를 건설업체에 매각하면서 생긴 현금 3백50억원을 남녀간 다르게 지급하자 헌법상 남녀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여성도 종원으로 인정해 동등하게 재산을 분배하라”고 소송을 냈다.

그러나 1심과 2심에서 모두 졌다. 종중은 ‘공동 선조의 후손인 성년 이상의 남성을 원칙으로 한다’는 판례를 법원이 30여년간 고수했기 때문이다.

# 불붙은 공방전

오후 2시가 되자 최종영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들이 자리에 앉았다. 이어 변론이 시작됐다. 앞서의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한 원고측 황덕남 변호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법원은 헌법정신을 살려, 바뀐 사회 관행에 따라 국민생활과 괴리되지 않는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들도 제사나 성묘에 참여하고 종중 회의 등에서 의결권을 행사하는 만큼 법원의 판단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黃변호사는 “안동 권씨의 경우 40개 종중 중에서 19개가 여성을 종원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례도 소개했다. 또 그는 종중의 주요 임무가 친목도모인데 여성을 종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고 했다. 해외에서 사는 남성들이 많은데 남성이 모자라 종중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도 되물었다.

원고측은 30분간 이어진 변론에서 “여성이 과거 종속적 지위에서 벗어나 남성과 동반자적 관계로 가고 있다”고 상기시켰다. 원고측은 “여성이 소외받지 않아야 함을 법원이 선언해달라”며 변론을 마쳤다.

피고측은 종중이 공동 선조의 분묘(墳墓)를 지키고 제사를 본질적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여성은 이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종원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맞섰다.

민경식 변호사는 “여성을 종원으로 인정하느냐는 지위 향상이나 양성 평등과는 관계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을 종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랜시간에 걸쳐 형성된 관습”이라며 이에 대해 “역시 오랜시간에 걸쳐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지 않는 한 바꿔선 안된다”고 맞받았다.

# 질문자로 나선 대법관들

원고측과 피고측이 변론을 마칠 때마다 대법관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고현철 대법관은 “출가한 여성을 종원으로 인정하면 외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원고측은 “부계 중심 제도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고 답했다.

한 대법관은 “종원도 아닌데 왜 재산을 여성들에게도 나눠줬나”고 물었다. 이에 피고측은 “후손들에게 적절히 배분한 것일 뿐”이라며 “시가에 가서 기를 펴고 살지 않겠느냐는 의견들을 접수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법관은 “여성이 친가에 효도하려고 할 경우 종원 규약이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냐”고도 물었다.

오후 3시10분 쯤 원고와 피고측 변론이 모두 끝나고 전문가들의 참고인 진술이 이어졌다.

이승관 전 성균관 전례연구원장은 “부계 혈통주의를 취하는게 당연하고 종중도 남자 후손들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거의 모든 종회 규정이 성년 남자를 종회원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덕승 안동대 교수(법학)는 “종중과 종중의 총회는 종회와는 구별되며 공동 선조의 자손이면 남녀노소 구별없이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년 남자로만 종원을 한정하면 미성년자가 제사에 참여하거나 딸들이 제사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는 관례는 어떻게 설명하느냐고 덧붙였다.

대법관들은 참고인들의 진술이 끝난 뒤에도 일일이 질문을 던져가며 양측 주장을 꼼꼼하게 저울질하는 모습이었다. 오후 5시15분 쯤 모든 변론 절차가 끝났다. 최종영 대법원장은 “최종 판결일은 대법관 회의를 거쳐 추후 알리겠다”고 말한 뒤 자리를 일어섰다. 판결의 무게 때문일까. 그의 얼굴이 편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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