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이과수 혁신 세미나' 독자의 특종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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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공공기관 감사들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지난달 23일 오후. 본사 편집국에 독자 전화가 걸려 왔다.

"우연히 친척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참다 못해 전화했습니다. 감사라는 사람들이 국민 세금으로 열흘씩이나 남미 단체여행을 간다니 어이가 없어서…."

중앙일보의 '공기업.공공기관 감사 21명, 혁신 세미나하러 남미 이과수 폭포 간다'는 15일자 기사는 이렇게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독자의 제보로 시작됐다.

제보자는 망설임 끝에 전화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3월 말 본지의 '노무현 정부 4년…공기업만 살쪘다'는 시리즈 기사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계속 공공기관의 방만한 경영 실태를 파헤치겠다는 중앙일보의 약속을 지켜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본지의 취재진이 가동됐다. 먼저 제보받은 내용의 사실부터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곳곳에 암초투성이였다. 개인정보 비밀조항 때문이었다. 여행사나 항공사는 확인을 거부했다. 단지 14일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한다는 것과 애초 출장 신청자가 34명이라는 사실만 알아냈다. 최종 참가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미리 기사를 쓰기도 어려웠다.

취재진은 고민 끝에 출국 뒤 개별 확인을 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4일 오전 34개 공공기관에 일일이 전화했다. '혁신포럼' 출장을 갔는지, 언제 귀국하는지 한 곳씩 취재했다. 취재 결과 34명 가운데 21명이 비즈니스석을 이용해 출국한 사실이 최종 확인됐다. 일부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며 연막을 쳐 애를 먹기도 했다. 방문 기관도 애초 계획과 다른 경우가 나왔다.

보도의 반향은 컸다. 국회는 상임위원회를 열어 진상을 조사하기로 했다. 시민단체와 네티즌의 비판 여론도 뜨거웠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공기업.공공기관의 도덕적 해이 실태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환기됐다.

그러나 이번 기사의 공(功)은 취재진이 아니라 바로 그 익명의 독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의 제보가 없었다면 이번 보도는 불가능했다. 취재진은 그 독자의 제보를 확인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보충했을 뿐이다. 이런 은밀한 출장 일정은 여행사가 자발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한 알기 어렵다. 여행 당사자도 쉬쉬했다. 기획예산처에조차 구체적인 일정을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일 수만 명이 드나드는 인천공항에서 이과수 폭포로 출장 가는 공공기관 감사를 가려내기란 '신(神)'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뒤가 구린 일일수록 당사자는 한사코 감추게 마련이다. 결정적 제보가 없다면 파헤치기 어렵다. 독자의 제보는 그래서 절실하다. 이번에도 깨어 있는 독자 한 사람의 제보가 세상을 바꾼 셈이다. 서슬 퍼런 청와대도 공기관 감독권을 거머쥔 기획예산처도 못한 일을 그 독자가 해냈다.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의 감시자가 될 때 세상은 좀 더 살맛 나는 곳이 되지 않을까. 중앙일보는 앞으로도 독자의 신선한 제보를 기다린다.

정경민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