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5)파월 장병「돈 맥」찾기|탄피뭉치 반입작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무더위 속에서 작업하느라 땀을 엄청나게 흘렸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건기 때 남부 월남은 매일 섭씨34도까지 기온이 올라갑니다. 그 더위 속에 섭씨 3천도 가까운 용광로 곁에서 1년 넘게 일했어요. 위아래 옷을 다 벗어 던지고 팬츠만 입은 채 작업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기열씨(65·전 안기부장비서실장·예비역 대령)는『요즘 더위가 계속되니 월남에서「극비작업」을 하던 기억이 새삼 새롭다』며 『그때는 내 평생 흘릴 땀을 다 흘리는구나하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1968년 초 주월 한국군 100군수사령부(십자성부대)가 주둔하던 나트랑 지역.
부대의 공병대대장 이기열 중령에게 유학성 사령관(65·당시 준장·현 민자당의원)의 명령이 떨어졌다. 명령치고는 매우 엉뚱한 명령이었기에 이 중령도 처음엔 의아해 했다.
『귀관이 책임지고 1백55mm곡사포의 포탄 탄피를 녹이는 시설을 개발해내라. 인고트(INGOT=주괴·금괴처럼 쇠를 주형에 부어 일정한 형태의 덩어리로 만든 것)로 만들어 고국에 가져가면 큰돈이 될 것이다. 탄피는 내가 전투부대를 통해 조달해주겠다. 단,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하고, 특히 미군에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라.』

<지뢰밭으로 위장>
이 중령은 서울대공대 광산과 출신으로 대학졸업 후 삼척탄좌에 근무한 일이 있어 이런 일과는 상당한 인연이 있었다. 그는 6·25때 보충장교(종합24기)로 입대하면서 군 생활을 시작했고,67년 십자성부대의공병참모로 월남에 파견됐다.
『공병부대 주둔지 부근 정글에 인적 없는 계곡이 있었어요. 빽빽한 숲과 가시덤불을 뚫고 그곳까지 비밀통로를 만들었습니다. 계곡에는 약간의 공터를 내 작업장을 확보했고요. 우선 용광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대학 때 이론은 배웠지만 실제 제작해 본 적이 없어 애를 먹었어요. 더구나 한국도 아니고 월남 땅 정글 속에서 쉬쉬해 가며하는 판이었으니까요. 특히 디젤 유 분사장치를 만드는 일이 어려워 사이공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국에서 온 민간인 기술자중 이 방면에 경험 있는 사람을 찾아내 제작해왔지요.』
용광로 몸체를 만들기 위해 사이공 시내에서 내화벽돌을 몰래 사왔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한 달여 만에 용광로가 완성됐다. 용광로라고 부르기엔 조금 쑥스러운, 큰 아궁이정도 규모의 노(노)3개가 밀림 속에 설치됐다. 한 곳에 포탄탄피3∼4개를 넣어 녹일 수 있는 크기였다. 건강하고 과묵한 사병 3명을 차출해 특별대우를 해주며 극비로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장 주변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지뢰표지판을 둘러 세워놓았다. 물론 실제 지뢰는 없었다.
『한밤중에 청룡·맹호·백마 등 전투부대에서 쏘고 난 포탄탄피를 몰래 트럭에 싣고 우리지역으로 왔지요. 녹이는 작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됐어요. 워낙 원시적인 시설이었으니까요. 탄피의 신관 쪽 아연성분이 많은 부품은 떼어버리고 나머지를 가마에 집어넣었습니다. 파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가장 신경 쓰였죠. 미군 정찰기에 발각될까봐 연통을 만들어 달았지만 연기가 완전치 제거되지는 않더군요. 이렇게 녹인 놋쇠(구리와 아연의 합금)를 가로 세로 각각30cm가량 크기의 인고트로 만들었습니다.』

<군 자녀 학교설립>
유학성 사령관은 물론이고 주월 한국군사령부도 이 같은 작업진전에 크게 고무됐다. 맹호무대(퀴논)·백마부대(닌호아)등에 지시가 떨어졌다.
『장병을 몇 명씩 십자성부대에 보내「특수기술」을 배워오도록 하라.』
이 중령은 간이용광로 제조·작업방법을 다른 부 대원들에게도 가르쳐 주었고, 교육 후 귀대한 그들은 자기네 지역에 각자 시설을 만들어 탄피를 녹이기 시작했다.
한국군이 만든 막대한 양의놋쇠덩어리는 뒤에 우리 해군수송선(LST)에 실려 진해해군기지로 몰래 옮겨졌다. 전쟁터에 그냥 버려질 수도 있는 쇳조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정부의 재산. 이 때문에 뒤늦게 한국군의「밀수」를 알아챈 미국 측과 분쟁이 빚어졌다.
국내에 반입된 놋쇠덩어리는 장항제련소로 넘겨졌고, 국방부는 매각대금으로 강원도춘천에 군인자녀들을 위한 고등학교(제일고·현 강원대수대부고)를 세웠다.
당시 주월 군수사령관이던 유학성 의원의 증언.
『내 전임자인 이범준 장군(64·전 국회의원·교통부장관)께서 이미 막대한 양의 탄피를 모아두었더군요. 우리가 만든 인고트는 시레이선 박스에 딱 들어맞을 정도의 부피였어요. 선적이나 국내반입에 편리하도록 제작한 것이지요. 그때 만든 인고트는 다 합치면 LST로 3척 분량이나 됐습니다. 상부에서는 조금씩 반출하자고 했지만 나는「한꺼번에 왕창 실어가야지, 아니면 미국 측에 들키기 십상이다」고 주장했지요 .우리가 정글에서 뽑아낸 구리·아연은 당시 우리나라의 1년 치 생산량과 맞먹을 정도의 막대한 분량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중 한 척 분량은 무사히 고국으로 갔는데, 두 번째는 미국 측에 들통나서 배가 월남으로 되돌아 왔어요. 이왕 고생해 만들어 놓은 쇳덩이가 산처럼 쌓여 있어 너무 아까웠습니다. 오기로 파월 기간이 끝나 귀국하는 병사들에게 하나씩 맡겨 고국에 보냈지요. 그게 다 돈이 된 겁니다. 지금 보아도 우리는 애국했다고 생각해요. 비록 나 자신은 귀국 후 이 문제로 입장이 난처해져 한때 고등군법회의에 넘겨질 각오를 했을 정도였습니다만.』

<국방부장관 지시>
「탄피수송작전」은 집안의 양은그릇도 몇 번이고 땜질해가며 소중치 쓰던 당시 우리나라의 어려운 나라살림을 반영한다. 동시에 60년대 말∼70년대 초 우리의 경제도약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던「월남특수」중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한 부분이기도 하다. 작업자체가 비밀리에 진행됐고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특히 한국에서의 처분과정에는 중앙정보 부와 군 방첩대가 깊숙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김성은 당시 국방부장관은 자신이 이 작전을 채명신 주월 사령관에게 지시했다고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일이 나중에 미국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된 뒤 전말을 보고 받았고 이때 김 장관은 『당신, 알고 보니 해적이구먼』이라는 박대통령의 농담을 얻어들었다고 기억했다. 그의 증언.
『월남으로 떠나게 된 채 사령관을 가만치 불러 부탁했지요.「가거든 쏘고 난 탄피를 미국에 다 돌려주지 말고 몰래 가져옵시다. 브라스(놋쇠)가 꽤 비싼 금속 아닙니까. 전방에 근무하는 군인자녀들을 위해 춘천에 학교를 짓는다고 기공식은 해 놓았는데 문교부에서 예산배정을 해 줄리 도 없고, 국방부예산도 없고 하니 그거라도 해서 돈을 만듭시다」는 말을 했어요. 월남현지에서 1년 가량 작업을 계속해 들여온 인고트는 4백t가량으로 기억납니다. 진해해군기지를 통해 쇳덩이를 들여온 뒤 장항제련소와 교섭하니 t당 30만∼40만원을 쳐주겠다고 해요.4백t이면 적게 잡아 1억2천만 원 아닙니까.60년대 말의 1억2천만 원은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들여오려다 그만 미군에 들켜버렸지 뭡니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