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사령관, 김 국방에 공식 항의|군인자녀에「기증형식」으로 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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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부의 원천지」로서 월남을 둘러싼 전시 지하경제를 막후에서 조절하던 미국이 이 같은 낌새를 놓칠 리 없었다. 놋쇠 4백t을 실은 첫 배가 월남 나트랑 항구를 떠날 때부터 미국정보기관은 이미 수상한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미군비행기가 줄곧 배를 따라오며 항로를 점검했고, 오키나와에서는 그곳 기지의 미군비행기가 임무를 교대, 한국까지 따라와 진해 입항을 확인한 뒤 돌아갔다』고 한 관계자는 말했다. 게다가 우리 함정의 무전 법이 남해안에서 암호문 아닌 평문으로 본국기지와 교신하는 실수까지 범해 이래저래 미국에 증거를 잡히게 된 것 같다. 미국 측은 항구에 갓 들어온 우리 함정을 즉각 조사했다. 배 밑창에 차곡차곡 쌓인 인고트를 촬영한 사진자료들이 미국 본토로 넘어갔다.

<배 밑창 뜯고 촬영>
김성은씨의 계속되는 증언.『어느 날 비치 유엔사령관이 나를 보자고 하더군요. 만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봉투를 하나 내밀며 뜯어보라고 합디다. 이중봉투 겉에는「톱 시크리트」라고 씌어 있었어요.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쏘고 난 탄피는 모두 미국정부의 재산이다. 그런데 한국군은 반납하지 않은 채 진해기지로 가져갔다. 대단치 유감이다. 이 일에 관여한사람을 엄중 문책하고, 추후 재발하지 않도록 장관이 조치를 취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웃으며 비치에게 말했어요. 「미안하게 됐소. 내가 시킨 일이니 처벌은 나부터 받아야 될 형편이오.」 비치가 놀라며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묻더군요.』
『문제의 탄피는 지금 장항제련소에서 처리중이다. 생긴 자금으로는 이동이 잦은 군인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려 한다. 사적으로 착복하지는 않았다. 조사해 보라. 이제 와서 미국이 달라면 내놓겠지만 그보다는 우방인 미국이 한국군 자녀들을 위해 기증하는 형식을 취하는 게 어떠냐...』김 장관의 설명은 매우 길고도 간곡했지만 결론은 한마디로『좀 봐달라』는 것이었다. 비치는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여유를 주시오. 우리 대사나 본국정부에 의견을 구해보겠소.』
결국 이미 반입된 인고트는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조건아래 미국정부가 한국에 억지선심으로「기증」했다.
주월 사령관이던 채명신씨는 당시의 우리 행위가「일종의 밀수」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어차피 전투 후 정글에 버려진 탄피는 베트콩의 손에 들어가 도로 우리 가슴을 겨누었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미국인들이 가졌을지도 모를 「거지근성을 못 버린 군대」라는 우리에 대한 시각과는 별개로 물자에 굶주린 한국군은 나름대로 자기변명이 확고했다. 그만큼 나라사정이 딱하기도 했다.

<"내가 책임지겠다">
채씨의 설명.
『그 더운 나라에서 베트콩과 전투를 벌인 뒤 철수하기도 바쁜데 우리는 탄피를 챙기느라 이중고를 겪었습니다. 쏘고 난 탄피가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그걸 가져오는 우리측에 원가 인센티브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우리의 탄피 반납 실적이 미국이나 월남보다 떨어지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반납 률이 높았지요. 그 나머지로 인고트를 만든 겁니다. 그냥 두면 탄피는 캄보디아국경근처의 베트콩 군수공장에서 재생돼 아군을 희생시켰을 겁니다.』
채명신 전 사령관은 이런 이유로 본국에서 작업을 중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때도『내가 책임지겠다』며 한동안 강행했다고 회고했다.
월남특수는 잘 알려진 대로 한진그룹을 필두로 한 유수한 국내 대기업들의 초고속성장의발판이 되었다. 민간기술자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고국의 가정을 살찌웠다. 월남 패망 후에는 중동특수로 이어져 7O년대의 호경기를 낳았다.
귀국장병들은 텔리비전을 가져와 팔아 장가갈 밑천을 마련했다.
『당시는 우리 집에도 텔리비전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었지요. 장병들이 귀국 후 부산에서 TV 한 대를 팔면 7만원을 받을 수 있었어요. 월남에서의 TV가격은 1백∼1백20달러인데, 그때 환율이 달러당 3백 원 가량이었으니까 7만원에 팔면 두 곱 넘는 장사가 되는 겁니다. 7만원으로 돼지새끼를 40마리는 살 수 있었으니 농촌에서는 거금이었습니다. 부산바닥에 귀국장병을 상대로 한 텔리비전 장사꾼들이 득실거렸지요. 한번은 국세청에서 국내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제동을 걸어 「텔리비전의 국내반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대통령훈령이 떨어지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월남현지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나는 아예「TV한 대와 냉장고 한대의 휴대를 허가함」이라는 반출 증까지 귀국장병에게 내주며 훈령에 불복했고, 이게 말썽을 빚었어요. 건방지다는 거였지요.』(채명신 전 주월 사령관)


채 사령관은 일시 귀국하는 김용휴 부사령관에게 부탁해 훈령을 취소해달라고 박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편지를 전하도록 했다.
얼마 후 김학렬 청와대경제수석이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월남을 찾았다.「파월 장병들의 노고를 생각해 훈령을 취소하니 사령관의 방침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TV반입은 계속될 수 있었다.
당시 주월 대사관 상무관을 지낸 노진식씨(59·현 공항터미널사장)는『돈 벌겠다고 눈만 부릅뜨고 다니면 얼마든지 벌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파월 기술자들은 보수로 미군군표를 받으면 홍콩의 은행에 가그린 백(미 본토달러)으로 바꿨습니다. 사이공에 돌아오면 돈 가치가 군표로 쳐서 2∼3배나 뛰었어요 . 군이든 민간이든 월남특수는 대단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업계는 국가에서 파법한 덕분에 큰돈을 번 것이지요. 당시 군인들의 회생과 국가의 고마움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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