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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생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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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중세 바로크 시대의 거장 루벤스는 '예술 마케팅'에도 능했는지 왕가와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를 잘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4세 같은 단골 손님의 주문이 밀려들면 후배나 제자를 불러 '생산 라인'을 가동했다. 1년여 만에 대작 회화 56점을 완성하기도 했다. 모작(模作) 시비를 잠재우는 데도 기막힌 이벤트를 동원했다. 호화로운 스튜디오에 '큰손'들을 초청해 작업을 지켜보게 한 것. 커다란 화폭을 쓱쓱 채워 가면서 비서에게 장문의 서신을 구술해 '멀티 태스킹' 능력을 연출하는가 하면, 2m나 되는 화려한 곡선을 일필휘지로 표현해 내 '다작의 천재'임을 과시했다.(오브리 메넨, '예술과 돈')

사실 그는 매우 특이한 캐릭터다. 고금동서의 재능 있는 미술가치고 루벤스처럼 비즈니스맨 기질과 쇼맨십을 두루 갖춘 이는 드물다. '아끼는 내 그림 25점을 500프랑에 떨이할 테니 당장 사 주게나.' 이런 궁박한 편지를 친구에게 부치곤 했던 모네처럼 무명과 가난의 설움을 운명처럼 안고 산 경우가 보통이었다. 중세의 왕과 교회, 르네상스 도시국가의 신흥 부르주아가 든든한 물주이던 시절은 그래도 나았다. 이들이 몰락한 산업사회의 미술 시장은 싸늘한 자본의 논리가 횡행했다. 우리 근세 화단의 이중섭과 박수근도 생활인으로는 빵점에 가까웠다. 재료비가 없어 담배 은박지 뒷면에 그림을 남기고, 미군 부대 PX에서 5달러짜리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생계를 이었다.

한국의 미술품 시장이 1970년대 아파트 건설 붐, 90년대 초반의 88년 서울올림픽 특수에 이어 제3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에는 작가 이름만 보고 그림을 주문하는 '묻지마 투자'까지 등장했다. 서울 인사동 은어를 빌리면 투기 세력의 '돈질'이 시작됐다. 경매 시장에선 박수근.김환기.이중섭의 점당 낙찰가가 10억원을 넘어섰다. 한국 회화의 전통 '빅3'가 '100만 달러 클럽'에 가입한 것이다.

미술판에 모처럼 화색이 돌고 있다. 이 김에 미술가와 컬렉터.기업.화랑.옥션업체 할 것 없이 힘을 모아 그림 값을 둘러싼 뿌리 깊은 난맥상을 풀어 나갔으면 좋겠다. 크리스티나 소더비는 아직 까마득하지만 적어도 수요.공급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미술 생태계를 갖춰 나갔으면 한다. 그게 루벤스처럼 수완 좋은 화가뿐 아니라 이중섭이나 모네처럼 '주변머리 없는' 화가들도 대접받으면서 작품활동에 몰두할 수 있는 세상이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