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막올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가난과 병마와 싸우다가 한떨기 꽃처럼 스러져간 미미의 이름을 외치면서 로돌포가 흘리는 눈물은 함박눈으로 바뀌어 다락방 위로 흩날린다. 지붕이 뻥 뚫린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18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막이 오른 '라보엠'(연출 베르나르 슈미트)은 국내 최초로 실내 체육관에서 상연된 오페라다.

객석 규모는 8천5백석. 상암 월드컵경기장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각각 상연된 야외 오페라 '투란도트'(3만5천석), '아이다'(5만석)에 비해 훨씬 적은 숫자여서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한글자막용 스크린에는 주역 가수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담지 않았다.

무대 정면의 2층 구조물은 마치 실물처럼 느껴지는 첨단영상(PIGI)기술 덕분에 다락방.모무스 카페.주막집으로 자유자재로 변신했다. 무대 세트는 빛의 팔레트로 그려내는 거대한 캔버스다.

2막에서 원형무대 전체를 활용해 움직이는 군중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B석(7만원)이나 크리스마스석(5만5천원)이 30만원짜리 VIP석에 못지 않다. VIP석에서 미세하게 감지되는 메아리도 스탠드의 뒤쪽으로 올라갈수록 덜하다. 싼 좌석에서 높은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이례적인 경우라 할 만하다.

'라보엠'은 추운 겨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어서 송년 시즌에 잘 어울리는 오페라다. 하지만 '투란도트''아이다'처럼 이국적인 소재도, 볼거리가 화려한 작품도 아니다. 2막 모무스 카페 장면에서 등장하는 군악대와 피에로.불쇼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라보엠'이 감동을 주는 것은 제대로만 연주하면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푸치니의 음악 때문이다. 서울시향을 지휘한 마우리치오 아레나는 악보의 행간을 꿰뚫으면서 세밀한 터치를 구사해 음악적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로돌포 역의 테너 배재철은 풋풋한 젊음과 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려줬고, 테너 페르난도 델라 모라는 고음(高音)에서 보여준 음정불안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담은 극적인 연기가 돋보였다. 소프라노 디미트리 데오도슈.마리아 피아 요나타(미미 역)의 폭넓은 음역과 개성있는 음색, 소프라노 전소은.수잔나 사빅(무제타 역)의 농염한 연기가 곁들여진 앙상블만 들어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국내 최초로 원형무대에서 펼쳐진 오페라여서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무대장치 전환이 쉽지 않은 것은 야외 운동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케스트라는 모무스 카페 2층 옥상에 올라갈 계획이었으나 지휘자와 출연진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워 VIP석 앞에 자리를 잡았다.

지휘자의 모습을 담은 보조화면 3개가 설치되긴 했지만 출연진이 지휘자 쪽을 바라보게 되어 세트 양옆에서는 주역 가수들의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건물 세트의 활용도가 낮을 바엔 차라리 중앙의 원형무대를 십분 활용하고 스탠드 전체를 객석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입장권 가격을 낮춰 '오페라의 대중화'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은 24일까지. 평일 오후 7시30분, 토.일 오후 6시(월요일 쉼). 02-581-1377.

이장직 음악전문기자<lully@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