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몸 불편한 주현이, 사랑을 갚고 싶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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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기 힘든 저를 위해 등.하교 길을 도와주신 홍은표 아줌마. 언젠가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보며 '예쁘다 예쁘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 무지개의 고운 빛깔도 아줌마 마음처럼 곱고 예쁘진 못할 거예요.

'고맙습니다'라는 말도, 어떤 선물도 그 맘에 전부 보답할 수 없단 걸 잘 알지만요 ….

오늘, 주현이를 만났습니다. 스물한살 주현이는 화장기 없는 앳된 얼굴이 아직 고등학생 같지만, 내년 2월엔 삼육대 자립생활지도자 과정을 졸업합니다. 한달에 두 번만 수업을 받는 1년짜리 과정이지만 주현이에겐 남들 4년 다니는 대학생활만큼 힘들었습니다.

주현이는 뇌성마비 1급 장애인입니다. 몇번이고 몸을 뒤틀어야 겨우 말 한마디를 할 수 있습니다. 작은 몸을 휠체어에 기대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습니다. 그런 주현이가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 태릉까지 먼길을 꼬박꼬박 수업을 받으러 다녔고, 이제 졸업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아…줌…마…가…."

숨을 토하듯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말하면서도 주현이의 눈은 웃고 있습니다. 매달 첫째.셋째주 일요일 주현이의 등.하교길을 함께 했던 홍은표(46) 아줌마 생각만 해도 즐겁나 봅니다.

인근 곤지암에서 남편과 함께 밭농사를 짓는 아줌마. 인터넷에서 주현이를 도울 차량 봉사자를 찾는다는 글을 읽고 전화를 하신 것이 지난 5월이었습니다. 일요일엔 아줌마도 자신의 세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텐데, 오전 9시면 어김없이 손수 차를 몰고 주현이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하루 종일 수업을 받고 지친 몸으로 강의실을 나설 때면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휴게소에서 주현이가 좋아하는 우동가락을 가위로 하나하나 잘라 숟가락 위에 얹어주신 것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빨간 인형을 억지로 안겨주신 것도 아줌마였습니다. 9월 하늘에 낀 먹구름 사이로 또렷이 걸린 쌍무지개를 보면서 "예쁘다! 예쁘다!"하고 함께 기뻐했던 것도 아줌마였습니다.

"고…마…워…서…요."

주현이는 오늘 아줌마께 선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지난달 31일, 마지막 수업 때 손수 만든 양말 두켤레를 드리긴 했습니다. 주현이가 살고 있는 중증장애인 시설인 '한사랑마을'의 작업활동 시간에 직접 스텐실(염색 기법의 일종)로 무늬를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건 돈주고도 못사는거다"면서 두켤레 다 아줌마 딸들이 가져가고 말았답니다. 쬐…끔…서운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한사랑마을에 찾아오는 대학생 산타오빠들처럼 주현이도 오늘 아줌마께 멋진 선물을 드릴 거니까요. 며칠전 같은 방에 있는 친구들, 선생님과 함께 사회적응 훈련을 하러 분당으로 나갔을 때 '뭐든지 다 있을 것 같은' 대형 마트에 갔습니다. 아끼고 아낀 후원금을 통장에서 직접 꺼내 꼭 쥐고, 미로 같은 대형 마트를 몇번이고 휠체어로 빙빙 돌았습니다.

지난번 양말처럼 손수 만든 선물이 좋지 않느냐는 '기자 언니'의 질문에 주현이는 손발을 버둥이며 아니라고 합니다. "밖…에서…사면…훨씬…좋아요…." 몇번이고 몇번이고 설명하는 주현이. 그렇습니다. 몸이 불편한 주현이에게 매끄럽게 만들어진 '바깥 세상'의 물건은 참 좋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돈 내고 사면 되는' 물건을 마련하는 것이 주현이에겐 작업장에서 공들여 손수 선물을 만드는 것보다도 정성이 필요한 일입니다. 아줌마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어서, 자꾸만 휠체어에서 미끄러지는 몸을 추스리며 복잡한 마트 안을 누볐습니다.

"언…니! 포장해…줘!"

정성껏 고른 선물을 예쁘게 포장하고 싶지만 맘처럼 손이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한사랑마을의 목옥순(38)선생님을 졸라 리본까지 매고서야 주현이는 안심합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카드는 생략. '고맙습니다'라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줌마가 올 때는 아직 멀었는데 주현이는 현관 앞까지 휠체어를 몰고 나갑니다. 바깥 바람이 매운데 춥지도 않나봅니다.

"주현아~ 잘있었냐~."

아줌맙니다. 주현이 얼굴이 환해집니다.

"이게 뭐냐? 선물? 아이고…이 녀석아… 지난번에도 줬잖아!"

자꾸 이러면 너 안만나러 올 거라고 아줌마가 핀잔을 주는데도 주현이는 마냥 좋습니다. 어서 풀어봤으면….

조그만 핸드 크림이 포장지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손…이…거칠어…보여…서요."

운전대를 잡은 아줌마의 손이 마음에 걸렸다는 말에 홍은표씨는 금새 눈물이 글썽해집니다. "아이고… 언제 그런 건 봤냐…." 콩알만큼 크림을 짜서 조심조심 손에 발라보는 아줌마. 이거 참 좋다는 아줌마에게 주현이는 "쪼…끔… 비싸요"라고 수줍게 자랑합니다. 아줌마는 크림을 듬뿍 짜서 주현이 손과 약간 거칠어진 볼에까지 발라줍니다.

까르르 웃는 주현이를 바라보던 같은 방 친구 소희(21)가 자기도 엄마한테 선물을 할 거랍니다. 열다섯살 때 소희에게 "엄마라고 부르렴"한 뒤부터 매달 한번씩 꼭꼭 찾아와 옷가지며 먹을 것을 선물하시는 분입니다. 6년동안 보살펴준 '엄마'에게 왜 한번도 선물을 드릴 생각을 못했을까요…. 이번에 엄마가 오시면 작업 시간에 제일 예쁘게 만든 리본핀을 직접 머리에 꽂아드릴 겁니다. 뇌성마비 장애 때문에 제 손으로 머리도 못 묶는 소희지만, 엄마가 오실 때까지 매일매일 연습할거니까요. 몇번이고 머리핀을 떨어뜨리더라도 엄마는 웃으며 껴안아 주실 거라는 걸 소희는 압니다.

글=구희령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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