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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아침] '옷걸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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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옷걸이'- 이경림(1947~ )

불 꺼진 방 귀퉁이

장롱과 벽 사이에 그가 서 있다

비썩 마른 몸에

불쑥불쑥 못대가리를 내민 그가

후줄근한 껍데기를 자신에게 벗어 걸고

세상 모르고 잠든 식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틈에

새우처럼 구부리고 누운

자신을 보고 있다

캄캄함으로 꽉찬 하루를 보고있다


아버지가 그러했으리. 어머니가 그러했으리. 부모 없이 동생들만 남은 큰누이가 그러했으리. 천애고아로 남은 어린 손자들 보듬어 안는 할머니가 그러했으리. 할아버지가 그러했으리. 지상에 홀로 남은 자신을 바라보는 어리고 캄캄한 누군가도 그러했으리. 하지만 이 캄캄함 건너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것이 사람의 희망. 후줄근한 내 껍데기 받아 걸어준 누군가 있어 나의 오늘이 가능했다는 것. 살다 보면 나 역시 누군가의 후줄근한 껍데기 받아 걸어 줄 때 있을 것이니, 내 앞에 서 있는 그대여 오늘은 내 옆에 와서 누워라.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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