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일본군 총사령관 17대손 "조상 대신 사과드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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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칼을 겨눈 한.중.일 주역의 후손들이 12일 안동에서 400여 년 만에 횃불을 한데 모아 ‘화해의 불’을 점화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휘동 안동시장, 류성룡의 후손 류영하, 이이의 후손 이천용, 한 사람 건너 일본군 선봉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후손 고니시 다카노리,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후손 리스거, 이순신 장군의 후손 이종남씨. [안동시 제공]

12일 오후 3시 경북 안동시 낙동강변 탈춤축제장.

오전 내내 내리던 비가 그치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 선생 서세(逝世) 400주년 추모제전'이 열리는 행사장으로 도포와 유건 차림의 유림과 전국 향교에서 보낸 100여 개의 숭모기가 들어섰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영의정 서애는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전격 발탁하는 등 인재를 등용해 미증유의 전란을 수습했다. 그러고도 그는 당쟁에 휘말려 관직을 삭탈당한 뒤 낙향해 전란을 돌아보는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해 앞날을 경계하도록 했으며…'.

행사장 대형 스크린으로 선생의 일생이 소개됐다. 이어 개막 선언과 함께 선생을 기리는 묵념을 한 뒤 '화해의 불'이 점화됐다.

이순신 장군의 13대 후손인 이종남(71) 전 감사원장과 김휘동 안동시장이 이날 아침 서애 선생의 종택인 하회마을 충효당에서 옮겨 온 불씨로 횃불에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은 이어 횃불을 들고 무대로 올라가 한국과 중국.일본을 대표하는 네 사람에게 불길을 전했다.

네 사람은 서애의 14대 종손인 류영하(81)씨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7대 후손인 고니시 다카노리(小西尊德.73),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13대 후손인 리스거(李士革.41), 율곡 이이의 15대 종손인 이천용(65)씨.

전쟁 당사자인 한.중.일 장수 후손의 화해에 이어 사색당파로 갈라졌던 동서 간의 골도 함께 메우자는 뜻이다.

횃불이 타오르자 여섯 사람은 모두 뒤편 대형 성화대로 발길을 돌려 불을 한데 모아 붙이고 손을 맞잡았다. 합쳐진 불은 성화대에서 활활 타올랐다. 행사장엔 순간 화해를 기원하는 은종이 가루와 박수가 쏟아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총사령관을 맡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13대 후손 아사누마 히데토요(淺沼秀豊.53)는 화해의 불 앞에서 "선조를 대신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유창한 한국말로 머리를 숙여 행사장을 숙연케 했다.

고니시 다카노리는 "도요토미 독재자의 야심 때문에 조선에 고통을 준 선조도 전쟁 뒤 목이 베였고,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많은 분이 따뜻하게 대해줘 고맙다"면서 "이런 모임이 이웃 두 나라 간에 우호를 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리스거와 함께 온 이여송의 13대 손인 리쩌몐(李澤綿.46)은 "류성룡 선생의 사상은 고귀한 자산이 되어 후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이종남씨는 "서애 선생이 보여준 나라와 백성을 사랑한 거룩한 정신을 후세들에게 귀중한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안동시와 '서애 류성룡 선생 추모사업 준비위원회'가 평화를 염원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서로 칼을 겨눴던 전쟁 당사자의 후손들을 초청해 이뤄졌다.

준비위원회는 추모제가 열리기 전날인 11일부터 400년 만의 화해를 이끌었다.

11일 오후 7시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군자마을 광산김씨 종택에서 이들은 화해의 만찬을 했다. 임란 직후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와 금산에서 의병 700명과 최후를 맞은 조헌 등 의병 후손들과 중국과 일본의 장수 후손 등 100여 명이 머리를 맞대고 소회를 나누었다.

안동=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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