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출전 반세기 이런일·저런사연>(9)84년 L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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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5공의 엘리트 스포츠드라이브정책이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 LA올림픽이었다.
주요 국제대회 메달리스트들에게 주어지는 경기력향상기금(연금)이 현재규모로 확충된 시점이 이무렴이었고 LA올림픽등 굵직한 국제대회는 보통 「3백65일 작전」「5백일작전」등 요즘의 자금지원으론 상상도 할수 없는 장기합숙훈련이 어렵지 않게 시행되곤 했다.
그래서 스포츠인들 사이에선 5공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것도 사실이다. 전두환전대통령이 퇴임 이틀을 앞둔 시점에서도 태릉선수촌을 방문, 선수·체육관계자들을 격려한 것을 두고 요즘도 체육인들은 『체육에 대한 전전대통령의 열정과 애정을 함축한 대목』이라며 자주 화제로 떠올리곤 한다. 84년 LA올림픽은 83년1월17일부터 5백일 강훈에 돌입, 종목별로 체력·정신력·기술·해외전지훈련등 치밀한 사전준비 끝에 소련등 일부동구권이 빠지긴 했지만 금 6, 은 7개를 획득함으로써 48년 건국이후 28년간 한국이 따낸 금 1, 은 6, 동 11개의 메달보다 풍성한 수확을 올렸다. 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정치적 이유로 미국등 자유진영과 함께 보이콧한 한국은 8년만에 이같은 성과를거둬 감격이 더욱 컸다.
메달마다 눈물과 땀을 담지 않은것은 없겠으나 LA올림픽에선 여자농구·핸드볼이 구기종목사상 처음으로 은메달이라는 값진전과를 올려 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도 했다.
여자농구는 올림픽 선발전인 프리올림픽(84년5월·쿠바) 에서 하위권으로 처져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으나 동유럽의 보이콧으로 대리출전, 기대이상의 성적을 올렸다.
여자농구는 당시 「나가봤자 최하위」라는 체육계일각의 포기 종용을 받고도 굳센 정신력·팀웍으로뭉쳐 프리올림픽에서 완패했던 캐나다·중국·유고등에 연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 최강 미국에만 1패를 함으로써 다른종목의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을 일궈냈다. 당시 대표팀 코치였다가 현업에 복귀, 지금은 상업은행 태평로지점차장으로 부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있는 신현수(신현수)씨의 회고.
『첫 경기가 캐나다전이었는데 질것을 예상해서인지 그 흔한 응원단 한사람 안나왔더라고요. 어찌나 섭섭했는지…. 그러나 전에 선보인 적이 별로 없는 수비에서의 하프코트 프레싱(반코트 강압수비)에 캐나다는 물론 프리올림픽에서 우리한테 72-37로 대승했던 중국까지 69-56으로 나자빠지더군요. 최단신인 한국농구 돌풍이 계속되자 그때서야 응원단들이 몰리더군요. 물론 박찬숙(박찬숙·현 태평양화학코치)이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있었고 성정아(성정아·숙명여대체육과 재학중) 김화순(김화순 ) 박양계(박양계) 이형숙(이형숙) 최경희(최경희)등 대선수들이 코칭스태프의작전에 잘 따라준 덕분이지요』
여자핸드볼의 은메달도 눈물겨운 한편의 드라마였다. 올림픽 선발전인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중국에 아깝게 티킷을 뺏긴 핸드볼은 역시 동구권의 대역으로 출전했으나 남자선수를 능가한다는 평을 들은 최고의 체력·투지로 본고장인 유럽의 거한들을 잇따라 쓰러뜨리고 믿기지 않는 은메달을 따냈다. 당시 대표팀감독 이문식(이문식·정신여고교사)씨의말.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고나서 대표팀이 해체됐다가 6개월만인 6월6일 재구성, 40여일간 연습하고 7월15일 현지로 떠났습니다. 연습중에도 체력보강을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켰더니 기간이 짧아 몸이 굳고 볼을 던져도 나가질않는 거예요. 할수없이 체력훈련을 중단하고 러닝을 죽어라고 시켰더니 현지에 가서도 못달려서 못하겠다는말은 안나오데요.』
당시 핸드볼협회장이었다가 지난해 국민학교회장으로 백의종군한 김종하(김종하)씨는 『지금은 경기인들간의 갈등으로 잡음이 더러 나오나 당시엔 전원이 한마음으로 뭉친 「단일계보」였다』면서 『경기력이 융성하려면 선수못지않게 임원들의 단합도 중요하다』고 덧불였다.<신동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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