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서방|고 이응노 화백 기념관 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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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센강이 내려다보이는 파리근교의 양지바른 언덕에 번듯한 전통 한옥 한 채가 들어서고 있다. 이름하여 고암서방.
지난 89년 작고한 고암 이응노 화백이 끝내 이루지 못한 필생의 꿈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여만에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고암이 프랑스에 첫발을 디딘 게 지난 58년입니다. 얼마 후부터 그는 프랑스에 한옥 한 채를 지었으면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을 잘 모르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한옥을 통해 한국의 미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요. 그 꿈이 30년 만에 이루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고암서방의 상량식이 있었던 지난 28일. 이응노기념재단 이사장인 미망인 박인경여사(66)는 마룻대가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깊은 회한을 감추지 못한다.
동백림사건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윤정희·백건우부부의 납치사건에 연루돼 모진 정치적 수난을 겪은뒤 끝내 이국 타향에서 목숨을 거둔 이응노화백. 고암서방의 건립은 고리화백의 한과 미망인 박씨의 집념이 이룬 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재와 기와 등 모든 재료는 한국에서 배로 실어왔고 집을 짓고 있는 목수들도 모두 서울에서 초빙한 사람들이다. 목재는 대백산에서 난 아름드리 소나무를 사용하고 있고 5명의 목수를 거느리고 작업하고 있는 도편수 조희환씨(50)는 송광사 대웅전중건을 담당하기도 했던 이름난 인간문화재 전수자.
터를 잡는 일에서 설계와 공사진행까지 맡고 있는 신영훈씨(58·문화재전문위원)는 집터가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강조한다.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45㎞ 떨어진 보 쉬르 센이라는 아담한 마을. 앞으로는 센강이 굽이쳐 흐르고 뒤로는 야트막한 동산이 이어져 있는 전형적인 배산림수지형. 그 동산 한가운데 해발 약60m 지점이 고암서방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좌청룡우백호가 완벽하게 갖춰진 곳이라는 게 신씨의 설명.
고암이 태어난 충청도 예산지방의 범절있는 선비집에서 안채만 따로 떼어낸 ㄱ자형의 정침건물로 안방과 건넌방·대청 등을 모두 합해 건평은 27평 규모.
프랑스측 건축가로 고암서방건설에 참여하고 있는 피에 르앙드레씨(42)는 『한옥의 날아갈 듯한 선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됐다』면서 유럽 초유의 전통한옥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목재로만 집을 짓는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해 시청측에서 세 번씩이나 건축허가를 거부했었다는 뒷 얘기를 들려주며 그는 이제 시청측에서도 자기 마을에 이런 건물이 들어선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덧붙인다. 오는 8월중순 고암서방이 완공되면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사람들은 물론이고 프랑스사람들에게도 개방, 한국의 정취를 맛보면서 갖가지 문화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할 생각이라는 게 미망인 박씨의 계획. 고암서방과 함께 근처에 짓고 있는 고암미술관이 완성되면 이 두 가지 건물을 연계시며 유럽에 한국문화의 진수를 소개하는 문화교육장으로 활용한다는 원대한 꿈도 갖고 있다.
현재 기초공사만 끝난 상태인 미술관은 오는94년 완공예정으로 박씨가 소장하고 있는 고암의 유작들이 모두 이곳에 전시된다.
프랑스의 예술가 묘역인 페르 라셰즈묘지에 묻히는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영광을 누린 유일한 한국인 고암. 고암서방의 상량식을 맞아 박씨가 손수 지은 상량문의 한 구절이 한 맺힌 삶을 살다간 대가 고암에 대한 애끓는 정을 담아내고 있다. 『고암의 예술을 사랑할 때 그곳에 한국이 있고, 한국을 이해할 때 그곳에 고암이 있음을 누가 부인하리요….』
【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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