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번1번」 이형근예비역육군대장(일요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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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통일은 환상보다 실체좇아야”/전후세대에 6·25본질 알릴 필요/군도 성숙… 정치적 중립에 자신
『6·25를 모른다고 젊은이들을 무조건 나무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시키려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대한민국 군번1번(10001)이자 창군의 주역이기도 한 이형근 예비역 육군대장(72)은 『단순히 6·25의 참혹성을 부각시키는 것만으로는 결코 젊은 세대들에게 그 참뜻을 이해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42년 일본 육사(56기)를 나와 36세의 젊은 나이에 대장으로 승진,초대 합참의장과 9대 육참총장을 지내고 58년 예편,주영대사·재향군인회장 등을 역임한 다음 현재 국정자문위원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이형근장군은 고희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정정하다.
­올해로 벌써 6·25 42주년이 됐습니다. 당시 일선 지휘관으로서 느끼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
▲6·25전쟁은 바로 동족간의 참혹한 전쟁이라는 점에 가장 큰 비극성이 있습니다.
이점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해야 할 시점에서 깊이 음미해 봐야 할 대목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반공교육도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6·25를 경험한 세대와 전후세대간에는 6·25를 보는 시각에서 이질감이 노출되고 있지요. 최근의 「이념세대」와는 아예 시각이 상반된 예도 많잖아요. 그러나 이들을 모두 무조건 불온시하는 식의 풍토도 무책임하다고 해와 되겠지요.
어떤 점에서 6·24는 당시 우리 지도층의 무능과 무사안일에서 비롯된 예고된 국난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따라서 이를 사전에 대비치 못한데 대한 책임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2의 6·25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데 그런 참화를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겠습니까.
▲정부는 지금까지 반공교육이랍시고 6·25의 원인이나 배경은 거두절미한채 오로지 단편적인 전투상황이나 전쟁의 잔혹성만을 부각시키는데 치중해 왔습니다. 낱낱의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뒤에 숨어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찾는 노력이 훨씬 중요합니다.
­동란중 부인과 동생을 함께 잃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나는 대전 제2사단장으로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부산에서 피난중 산고를 겪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고 같은해 청송전투에서 수도사단 참모장으로 참전했던 동생(이상근예비역준장)마저 전사했어요.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비극을 맞은 셈이지요.
엊그제 6·25날은 여느해와 똑같이 가족을 데리고 국립묘지에서 꼬박 한나절을 보냈습니다.
­6·25당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원자폭탄사용 의지에 쐐기를 박은 장본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군단장 시절인 52년 12월3일 방한중이던 아이크(아이젠하워의 애칭)가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기 위해 원자탄사용을 내비치더군요. 그때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일본의 경우를 잘 알고 있던 터라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은 좋으나 남북한 모두가 공멸하게 된다」며 이를 결사반대했지요. 쥐 잡기 위해 독을 깰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국 사람들은 자기들 편의만 생각하지 남의 사정은 깊이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아요.
­최근 사회일각에서는 군축이나 국방비삭감 주장이 높게 일고 있는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군축이나 국방비 삭감문제 등은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국방비를 줄여 학교를 짓자는 주장은 일견 바람직한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어찌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논리입니다. 남북합의서 채택이후 사회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바로 통일에 대한 환상인데,환상을 좇기 위해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금기시돼왔던 통일논의가 6공이후 대체로 해제되면서 통일에 대한 국민적 기대치도 급격히 팽창되고 있는데요….
▲통일은 어디까지나 목표지 과정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부는 지금까지 과정은 생략한채 늘 목표만 달성하려고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국민들은 지금 큰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과정을 잘 닦아야 합니다. 통일문제는 그 누구의 선거공약이나 선심의 소재가 돼서는 결코 안됩니다. 국민들로 하여금 통일에 대한 성급한 기대나 환상을 갖도록 만든 정부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특히 군의 정치적 중립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압니다. 얼마전 최세창국방장관과 김진영육참총장 등 군수뇌부들과 두루 만난 적이 있는데 한결같이 이 문제에 관해 자신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동안 군의 정치적 중립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한데는 정치인이나 군인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아무리 순수한 군인도 정치에 맛을 들이면 그 굴레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노 대통령에게도 취임식날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주어진 5년 임기동안 「육사출신 장군중에도 이런 대통령이 있구나」하고 국민들이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말입니다.
­군번 1번은 어떻게 해서 달게 된 겁니까.
▲2차대전중 일본군 포병대위로 중국·베트남전선에 투입돼 전투중 해방을 맞아 귀국했지요. 그후 「일본군 생활을 했으니 몸조심하라」는 아버님의 충고로 잠시 대전고에서 훈육담당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던중 미군정청으로부터 건군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46년 1월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에 육군대위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군번을 받아보니 바로 1번이었습니다. 군사 영어학교 졸업때 내 성적이 1위였기 때문이지요.
­최근 회고록을 쓰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시작한지는 그럭저럭 5∼6년 됩니다만 그동안 집중적으로 써오지 못해 올 가을께나 탈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군 멤버의 한 사람으로 건군이후 지금까지 우리 군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처음 시작이 됐던 겁니다.
원고를 정리해오면서 「내가 회고록을 쓰는게 아니라 참회록을 쓰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58년 예편이후 역대 어느 정권아래서도 정당이나 내각에 들어가 일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내가 극구 사양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니 내가 뭐 그리 잘난게 있는가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출생이후 나의 전생애를 담은 이 책의 제목을 가칭 「군번1번」이라고 정해 봤습니다. 지금은 거의 마무리단계에 와있는데 집필초기 한동안은 정호용 당시 국방장관이 소령 두명을 보내 원고정리를 도와준 덕분에 일을 수월하게 추진해 올 수 있었습니다.
10여년전 두번째 부인과 사별한후 서울 목동 신시가지 38평형 아파트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노장군은 『지금도 군가 소리만 들으면 금방이라도 청년장교 시절로 되돌아갈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며 호탕하게 웃어보였다.<김준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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