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병」에 걸린 일본/이상일(평기자 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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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생활대국」「환경대국」「원조대국」­. 요즘 일본 매스컴에서 즐겨쓰는 말들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초대국」「기술초대국」이란 말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대국론의 실체는 무엇일까.
○경원미끼 영향력 확대
「생활대국」이란 말은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 총리의 내치간판이다. 일본정부는 최근 오는 96년까지 ▲대도시 근로자의 5년치 수입으로 집한채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고 ▲연간 노동시간을 1천8백시간(7.5개월)으로 줄이며 ▲65세까지 계속 고용을 촉진한다는 등의 생활대국 계획을 마련했다.
현재 동경에서 집을 사려면 근로자의 9년치 수입,오사카(대판)에서는 7년치를 고스란히 모아야 하며 연간 평균노동시간이 2천시간을 넘고,정년이 보통 60세인 것을 보면 일본이 이 계획을 내놓고 큰소리 칠만도 하다.
「환경대국」「원조대국」은 주로 바깥을 겨냥한 것이다. 일 정부는 최근 정부개발원조(ODA) 대강을 마련,「지구환경에 대한 배려」와 「아시아중시」를 명기했다.
미야자와총리는 지난 13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유엔환경개발회의에 보낸 메시지를 통해 올해부터 앞으로 5년간 1조엔(약 79억4천만달러)의 환경ODA자금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또 내년부터 「아시아 선샤인 계획」을 실시,한국 등에 에너지·환경관련기술을 이전할 방침이라고 한다.
일본으로서는 지난해 1백10억3천만달러의 ODA실적을 기록,세계 1위를 차지한 것과 앞으로 지구환경보전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쓸 계획이고 보면 환경 및 원조대국이라고 떵떵거릴만도 하다.
○겉으로만 「공동번영」
그런데 흔히 대국이니 소국이니 하는 말은 남이 붙여주는 것이다. 한 나라의 국토·인구·자원·경제력·국제정치적 영향력·군사력 등을 종합해 국제사회가 평점을 매긴 결과다. 스스로 「대국」 운운하는 것은 유교적 동양사회에서는 미덕이 못된다.
그런데도 일본이 스스로를 대국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국제사회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행동해도 거칠것 없다는 자부심이나 자만심 때문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자민당의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랑) 「국제사회에 있어서 일본의 역할에 관한 특별조사회」 회장은 『세상이 바뀌었으므로 일본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안 심의때 『자위대는 유엔평화유지군(PKF)만이 아닌 유엔상비군에도 참여해야 하며 자위대가 여기에 소속돼 무력행사를 하는 것은 위헌이 아니다』고 했다. 오자와는 「군사대국」이란 말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미야자와내각에 대해 오히려 불만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생활대국」론이야 일본 국내문제인 만큼 논외로 하더라도 「환경·원조대국」론은 이런 맥락에서 몇가지 짚고 넘어갈게 있다.
일본은 ODA 대강에서 개도국이 환경 등 제반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민주화와 시장경제를 확립해야 하며 군비증강·미사일 개발·무기 수출입 등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정간섭같은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다. 미국의 흉내라도 내는 느낌이다.
결국은 일본이 원조를 통해 개도국의 환경산업 등 새시장을 더 개척하는 한편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하겠다는 뜻이다. 「기름먹인 가죽이부드럽다」고 엔화를 넓죽넓죽 받아 먹은 나라는 필경 일본의 입김을 꼼짝없이 받아들일 것이 뻔하다. 미국이 한국전쟁후 미 공법 480호에 의한 잉여농산물 원조로 한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더욱 확대함과 동시에 한국 소맥·원면 등의 농업을 파괴,이제는 미농산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나게 한다.
○「대동아공영권」론 연상
그런데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은 일본의 원조대국론이 아시아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 통산성은 92년판 경제협력백서에서 『아시아의 연속적 경제발전을 지탱한다』고 했으나 정작 아시아가 요구하는 일본의 비관세장벽·유통시장 개선문제 등에 대해서는 모른척 했다.
원조를 통해 아시아시장을 개척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데만 신경쓸뿐 국제수평분업에 의한 아시아발전에는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다. 무성해진 일본의 대국론에서 금세기초 대동아공영권론이 자꾸 연상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국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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