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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맞는 대학가|참전학생의 넋 누가 달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6·25는 탱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드러운 문인들의 뜨거운 지성으로도 적을 막아냈다. 언젠가 나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월터 머피 교수를 어느 지방의 사범대학으로 초청한 적이 있다. 그는 세계적인 정치학자요, 소설가이고 특히 6·5 참전 장교였다.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곧 초급장교로 참전하여 춘천 북방에서 2년 동안 싸우면서 머리와 다리에 두 차례나 부상을 입었다.
그의 「미국정치문화」에 관한 특강은 초청대학의 교수와 학생을 압도했다. 그때 어느 여학생이 투박한 질문을 던졌다. 『박사님! 우리 한국에도 미래가 있을까요』라고 하면서 혼탁한 우리의 정치문화와 학원의 혼란을 개탄했다. 머피 박사는 매우 숙연하게 『예, 미래가 있고 말고요. 확신합니다. 한국은 잊을 수 없는 나라이며, 나는 여러분을 존경합니다』라고 대답하면서 30여년전 전투 때 느낀 인상을 털어놓았다.
어느 날 그 처절한 전쟁터에서 그는 수색대를 이끌고 춘천북방을 정찰하러 나갔다. 밤에는 북쪽 산에서 중공군의 피리소리가 으스스하게 들려오고, 낮에는 유엔군의 전차포가 그 쪽을 향해 작렬했다.
하늘에서는 네이팜탄이 떨어지고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건 싸움터였다. 그가 손에 칼빈을 들고 어느 시골의 조그마한 국민학교에 들어가 보니 구석진 작은 교실에서 가냘픈 여선생이 열댓 명의 학생을 앞에 놓고 산수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순간 그는 손에 든 총이 참으로 부끄러워 그 총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싸움터에서 그 교단에 서 있던 그 여교사는 누구이고, 또한 자식을 학교에 보냈던 그 부모님의 교육열은 어떠한가. 바로 이 분위기에서 한국의 미래가 움터 나오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을 통역하던 교수가 흥분되어 말문이 막히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모두 숙연해졌다.
외국교수로서 6·25의 무용담 대신 이러한 지성의 덕담을 사범대학생에게 해주니 무척 고마웠다. 그러나 우리 교육계는 아직도 그 수많은 전쟁중의 미담과 용담을 캐내고 있지 못하다는데 생각이 미치니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서구의 역사 깊고 전통 있는 대학 총장실 옆에는 으레 제단이 있고 그것을 둘러싼 대리석 벽에는 『조국을 위해 총 들고 그 전쟁터에서 싸우다 전사한 동창』들의 고명대성이 깊이 새겨져 있다. 영국의 이튼 고등학교에서부터 프랑스 명문학교들, 그리고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 총장실이 그렇다. 그래서 대학 총장은 그들의 제주가 된 마음으로 이념을 지니고 국가적 인재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학교는 웬일인지 6·25와 전혀 관계가 없는 분위기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수많은 청년들이 바로 그 고등학교와 그 대학생들인데….
그들이 펜을 던지고 군에 들어가 이 나라를 지킨 것이다. 싸움은 비록 군대에 가서 했지만 그 전쟁에서 3년간 최전방을 지킨 주인공은 이 나라 학교출신의 지성들이었다.
4·19도 6·25가 있었기에 빛난다. 민주화도 조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길거리의 항쟁은 동상이 돼있는데 생사를 건 야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총 들고 죽어간 동문의 이름석자마저 기록되지 않은 대학이 무슨 전통 있는 민족의 대학인가.
역사의식을 지니고 일제에 항쟁하고 6·25를 겪은 이 나라의 지성들은 웬일인지 바로 그 대학의 동료·후배로부터 그 가치를 무시당하고 있는 듯 하다.
이 나라 대학가에는 데모의 영웅은 있어도 처절했던 6·25참전 동창은 이름도, 훈장도 둘 곳이 없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다시 한번 국립묘지에라도 찾아가서 그처럼 고귀하게도 조국을 위해 죽음의 앞에까지 전진했던 우리 동창의 한을 우리 전체의 학원 속에 심어두자. 그리고 왜 죽어야 했던가를 확실히 알아둘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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