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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공군지원 꺼려 중공군 한때 참전 보류”/6·25 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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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공 당사자료집/미와 충돌 피한듯
6·25에 개입,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간 중공군이 참전과정에서는 소련측의 공군력 지원 거절로 한때 참전결정을 보류하는 등 개입을 망설였던 사실이 밝혀져 주목을 끌고 있다.
스탈린은 소련 공군이 참전하면 미국과 직접 충돌하게 되는 점을 꺼린 것 같다.
지난 89년 비공개로 출간된 중공당사자료집(중공중앙당사연구실편) 31권에 수록된 「팽덕회가 명을 받들어 부대를 이끌고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전후사정」(팽덕회수명률사항미원조적전전후후)은 중공군의 참전과정과 주은래와 스탈린의 회담내용을 처음으로 자세히 밝혀주고 있다.<편집자주>
전쟁이 발발하자 중앙군사위(이하 군사위) 부주석 주은래의 주재로 50년 7월7일 중공중앙 군사위 확대회의를 개최해 동북변방군을 구성,가급적 빨리 압록강 이북으로 가서 명령을 기다릴 것을 결정했다.
9월이 되자 미군이 서울을 점령,밀고 올라왔다.
김일성은 중국대사 예지량과 삼찬시 군무를 불러 『중국이 가능한 빨리 군을 파견해 적을 반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10월1일 김일성수상과 박헌영외상은 연명으로 모택동주석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급전을 보냈다.
그날 북경 중남해에서 모택동주석 주재로 중앙정치국 상위회가 열려 이 문제를 밤새워 토론했고 10월2일 고강이 참석한 오후 3시 북경 긴급회의에서 출병방침이 결정됐다.
사령관을 동북 제4야전군 사령관이었던 임표로 결정했으나 임이 병으로 사양하자 팽덕회로 결정됐다.
진군시기는 일단 10월15일로 정했다.
5일 오후 다시 정치국회의에서 팽의 참석아래 출병문제가 논의됐다.
모택동은 이 회의에서 팽덕회와 고강에게 『10월8일 심양에 가서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중앙정치국 결정을 전달하며 입조작전을 준비하라. 나는 이 사실을 김일성에게 통보하겠다.
소련의 무기장비와 공군지원문제는 주은래를 모스크바로 보내 스탈린과 상의하여 신속하게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신의주에서 전보를 받고 곧바로 내무상이었던 박일우를 보냈다.
이 무렵 주은래는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과 소련 무기장비의 구입과 지원군 입조시 소련공군 지원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 무렵 스탈린은 크림반도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주은래는 그곳에서 9일 오후 7시부터 마렌코프와 몰로토프가 배석한 가운데 회담을 시작했다.
회담주제는 소련공군의 지원규모,지휘체계,소련 무기의 지원여부 등이었다.
그러나 예상밖으로 스탈린은 공군이 출동해 중국지원군과 함께 전투하는 것을 피했다.
스탈린은 주은래와의 회담에서 소련은 중국 20개사단의 무기장비를 공급하고 만주까지 이송해줄 수는 있지만 소련공군의 준비가 되어있지 못해 출동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스탈린과의 회담은 이튿날 새벽 5시에 끝났다. 주은래는 상황을 보고하고 『중앙은 출병문제를 재고하기 바란다』는 전보를 보냈다. 모택동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11일 오후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고강과 함께 12일 북경으로 돌아오라는 급보를 보냈다.
13일 오후 모택동주재로 중앙정치국 긴급회의가 열려 철야토론끝에 소련공군의 지원이 없더라도 출병하기로 했다.
17일 오전 팽덕회는 참모장 해방,박헌영 등과 도강이후 작전을 논의하고 있는데 돌연 13병단 사령원 등화로부터 『참전준비가 이루어져 있지 않느니 출병을 내년 봄으로 연기하자』는 전보를 받았다.
팽덕회도 모택동으로부터 주은래가 18일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니 회의를 통해 최종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18일 다시 회의를 열어 참전방침이 최종결정됐다. 개전 하루전이었다. 그리고 팽덕회는 모택동의 이름으로 작전시작 전문을 보냈다.
19일 팽덕회와 고강은 비행기로 단동에 도착했다.
도강이 시작됐다.<번역:이희옥한양대 중소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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