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쇼 프로 맛 ? '자막 조미료' 에 맡겨 다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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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황금어장’의 오윤환 PD가 종합편집실에서 ‘무릎팍도사’의 한 장면을 보며 자막 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김성룡 기자]

#5일 MBC TV 무한도전 '이영애와 만나다' 편. 유재석.박명수.노홍철.정준하.정형돈 등 무한도전 멤버들이 꿈에도 그리던 이영애를 직접 만나게 된 날이다. 다른 멤버들이 도착하기 전 유재석이 혼자 신나서 10분여간 방송을 진행하자 담당PD가 자막을 통해 한마디 한다. '진정제 먹여야 할까.' 뒤늦게 도착해 수위를 넘을 정도로 흥분하고 있는 노홍철 밑에도 자막이 한 줄 나간다. '미안해. 경찰에 신고했다.' PD의 개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영애가 "평소에도 무한도전을 열심히 본다"고 하자 자막을 통한 그의 화답이 압권이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할래요 ㅜㅜ"

#같은 날 SBS TV의 '작렬! 정신통일'.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공든 탑이 무너지랴' 등 출연자들의 관찰력.집중력을 테스트하는 각 코너에 대한 소개가 화려한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펼쳐진다. 메인 출연자인 김용만이 자신의 '살인 미소'를 보여주려 하자 갑자기 밑에 경고문처럼 생긴 자막이 하나 나간다. "지금부터 20초간 임산부, 노약자, 심신 허약자분들은 시청에 주의를 요합니다." 결국 그 미소로 다른 사람을 모두 쓰러뜨린 김용만의 어깨에선 검은 기가 일렁인다.

쇼 프로그램마다 '자막 전쟁'이 대단하다. 각자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개성 있는 자막 개발도 치열하다. 요즘 자막은 단지 출연자의 안 좋은 발음을 교정하기 위한 보조 수단만이 아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마디 자막은 출연자가 줄 수 없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방송이 끝나면 인터넷에 자막 내용을 두고 화제가 될 정도니 이제 쇼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한 축으로 자리 잡은 게 분명하다. 과거 '일본풍'이라는 지적도 있던 편집.자막이 "이제 '우리 식'으로 진화했다"는 게 방송계의 평이다.

◆PD가 직접 나선다=요즘 자막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PD가 화면에 직접 나선다는 것. PD가 자신의 감정을 담아 출연자들에 대해 평하거나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하기도 한다. 이는 '무한도전' 김태호 PD가 원조다. 자막을 통해 다소 모자란 듯한 MC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한편, 때로는 자신도 그들과 동화돼 흥분하며 자막을 내보내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는 다른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줬다. MBC TV '황금어장'의 '무릎팍도사' 코너 역시 간혹 진행자인 강호동.유세윤.올라이즈밴드 등이 수세에 몰리면 '에휴~'하는 담당 PD의 한숨이 자막을 통해 흘러나온다. 김 PD는 "예전에도 이런 식의 자막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시청자들이 자막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양한 콘텐트 활용=자막이라고 글자만 덜렁 나가는 경우는 없다. 일단 PD나 작가가 글귀를 만들면 전문 디자인팀에서 자막을 분위기에 맞게 꾸민다. 자막을 적시적소에 넣기 위해 다양한 편집 기법과 콘텐트를 쓰기도 한다.

기발한 편집.자막으로 재미를 본 게 '무릎팍도사'다.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갈 때마다 등장하는 '무릎팍산'이나 상대방을 녹다운 시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흘러나오는 "둥둥 두두둥~ 액션!" 효과음 등은 다른 프로그램에서 빌려갈 정도로 화제가 됐다. 이영자가 초대손님으로 출연했을 때는 그와 MC간의 설전을 비디오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의 배틀 장면으로 꾸민 자막을 내보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편집과 자막을 맡은 오윤환 PD는 "화면을 스케치북 삼아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려낸다는 심정으로 자유롭게 편집하는데 반응이 좋다"며 "평소에 음악.만화를 열심히 접하고 있다"고 했다.

◆일주일 내내 편집 작업=이들 프로그램의 편집은 일주일 내내 이뤄진다. 촬영이 있는 하루를 제외하고는 누군가 한 명은 항상 편집기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12명의 출연진이 나오는 '작렬!정신통일'의 경우 1차 편집에만 3명의 PD가 달라붙는다. 10대의 카메라로 찍은 100시간 이상 분량의 필름을 모두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일 밤샘 작업을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자막은 보통 방송일 전날 집어넣는다. 이 작업에 작가와 PD가 모두 투입되며 박승민 PD가 총괄한다. 분명 이처럼 편집과 자막에 상당한 공을 들이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화면에 담긴 콘텐트라는 게 제작진의 이야기다. 박 PD는 "자막은 프로그램의 맛을 살리는 조미료"라며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급적 자막을 쓰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김필규 기자<phil9@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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