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의 「유감」 표명에 유감/이수근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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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노태우대통령이 22일 지방자치단체장선거 미실시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다』고 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한 말이다.
김중권청와대정무수석비서관은 유감표명이 사과의 뜻이냐는 질문에 『국회의원들도 잘못되면 유감스럽다고 하지 않느냐』면서 『그런 정치적 발언으로 보면 된다』고 알쏭달쏭하게 설명했다.
보는 입장과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를 남기고 있다.
노 대통령이 말한 전후문맥으로 보면 국회가 정부제출의 관계법 개정안을 처리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쪽에 더 비중을 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사과를 빙빙 돌려 두루뭉수리하게 「유감」이라는 외교적 수사로 처리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다. 김대중민주당공동대표가 이를 사과로 단정하고,그렇다면 위법행위를 시인한 이상 법을 제대로 시행하라고 다그치는 것이 한 예다.
아마 청와대측은 김대중대표와 같은 시각을 우려해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외교적 언사로 국면을 빠져나가려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노 대통령의 유감표명에 글자 그대로 유감을 표시하고 싶다.
첫째,『전후사정이야 어떻든…』이라는 대통령의 말처럼 단체장선거 미실시는 명백한 위법사항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정부와 노 대통령의 대응자세가 너무 안이하고 고식적인 것은 적극적인 여론이 일어나고 있지 않음에 편승하려는 태도가 아닌가 짐작된다.
청와대측은 대통령의 연두회견 및 법 개정안의 적법기간내 제출 등을 상기시키면서 할 일은 다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또 지난 12일 내무부 명의의 연기불가피성 광고를 냈고 다수 국민이 법리이전에 한해에 선거를 네번 치르는 문제에 걱정하고 있으니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믿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부는 명백한 위법을 마음대로 저질러도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통령이 무엇때문에 뒤늦게나마 유감표명을 했단 말인가.
둘째,정치·사회적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중대현안에 대해 대통령이 수석비서관들 앞에서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온당하느냐의 문제다.
국정최고책임자라면 분열되고 있는 국론을 통합하기 위해 현실적인 위법사실에 대해 사과하고,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소상하게 국민들을 설득하는 공개적이고 당당한 자세를 보였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흔한 담화문 발표나 기자회견은 왜 못하는가.
대통령의 「유감」에 정말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는 답답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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