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4)<제88화>형장의 빛(9)|구명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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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의 농협 분소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난 것은 81년 2월 6일 방에서 7일 새벽 사이였다. 분소장 이원항씨(당시 38세)가 가슴과 등을 흉기에 찔려 숨졌다..
수사가 겉돌고 있던 2월 19일 밤, 안양 역전우체국 금고를 털려고 들어갔던 일당 3명이 붙잡혔다. 이미 다른 절도사건으로 2월 7일 검거되어 수원지검으로 송치된 이태성·권혁구와 함께 최재만은 평택 안정리 농협사무실에 침입, 금고를 열려다 실패해 현금 9천 원과 양담배 10갑을 갖고 달아난 죄가 더 있음이 밝혀졌다. 경찰은 최·이·권 세 사람을 금고 털이 전문조직으로 판단, 청계분소 살인사건과 관련여부를 추궁한 끝에 자백을 받아냈다. 그러나 청계분소 사건에는 지문 등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수원지검에 넘어간 최씨는 청계분소 강도살인만은 부인했다. 경찰에서 한 자백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했다.
81년 5월 26일 수원지법에서 1심 첫 공판이 열렸다. 세 사람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아 국선 변호사가 붙었다. 최씨는 가족들에게 『곧 무고한 것이 밝혀져 나가게 될 터이니 변호사 선임에 돈 쓸 필요 없다』며 변호사 선임을 극구 말렸다고 한다. 이태성은 혈육이라곤 누이밖에 없었고 권군은 부모가 농사를 짓고있어 변호사를 구할 돈이 없었다. 1심에서 좋은 변호사를 만나게 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생과 사가 결정된다는 것을 이들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1심에서 이들은 청계분소 사건은 모두 부인했으나 신속한 재판 끝에 최피고인은 사형, 이·권 피고인에게는 무기형이 선고됐다. 세 피고인은 즉시 항소했다. 억울한 사건이라도 상급심에 올라갈수록 무죄 받기가 힘들다는 것은 재판의 상식이다. 항소심은 6차까지 진행됐으나 모두 기각됐다.
세 피고인은 상고했다. 최재만은 원고지 3백장 분량의 상고 이유서를 썼다. 『청계분소 살인현장에 범인이 버리고 간 점퍼가 내 것이라고 자백을 강요하며 고문과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내가 입었던 점퍼는 청파동 누님 집에 있다고 말했더니 누님 댁에서 점퍼를 가져와 대조한 후 사실과 다르자 점퍼얘기는 나오지 않고 수사과정에서도 빼버렸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자백해야 할지 몰라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의사의 오진이 인간생명을 파괴하 듯 법관의 오판은 한 인간을 파멸하고 그 가족까지 불명예 속에 살도록 합니다….』
그러나 82년 4월 13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 형을 확정했다. 대법원의 형 확정판결은 사실상의 사형집행 허가장이다. 기적이 없는 한 2∼3년 안에 처형되고 만다.
서울지방변호사회 김태형 변호사는 83년 12월 13일 수원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최재만이 살인범이 아니라는 증거를 몇 가지 제시하기도 했는데 ①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피묻은 점퍼가 최의 혈액형과 일치하지 않자 경찰이 증거물로 제출하지 않았다는 사실 ②수사기관은 최등 3명이 범행 전 농협 분소에 들러 사전 답사했다고 기소했으나 그 당시 최를 보았다는 여직원의 진술이 그후 엇갈렸다는 사실 등을 재심이유로 제출했다.
그러나 재심청구는 84년 9월 17일 『객관적 우위성이 있는 증거가 아니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최는 9월 22일 재심청구기각에 대한 항고장을 즉시 냈다. 최의 사형이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형집행만은 일단 보류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서가 서울변호사회 7백 명 회원의 이름으로 법무부장관에게 전달됐다.
정해창 법무부장관은 확정된 사형수의 구명운동에 변호사회가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인지 형 집행을 미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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