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 사장|부킹 압력에 마음 편할 날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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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골프장 사장-.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화려하고 힘(?)깨나 쓰는 자리로 보여진다. 지난달 모 골프장 P사장의 혼사에는 내로라 하는 인사들을 비롯, 7백여 명의 하객들이 예식장을 가득 메워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더욱이 요즘처럼 골프장 부킹(예약)이「하늘의 별따기」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골퍼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골프장 사장자리를 떠올려봤을 것이다. 골프장 사장이 되면 골프도, 부킹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시큰둥한 반응뿐이다. 심한 경우에는 골프장 사장자리는「개밥에 도토리」라고 자조를 서슴지 않는다.
물론 골프장 사장하면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던 시절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50∼60년대만 해도 골프는 일부 상류사회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었으며 이들과 수시로 만날 수 있는 골프장 사장을 아무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가 이젠 별 볼일 없는 자리로 곤두박질한 것은 그동안 골프장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난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골프장 사업여건이 엄청나게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골프장에 대한 각종 규제가 강화된데다 각종 세금과 부담금으로 사장이 처리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늘어나 동분서주해야 함은 물론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 역시 다른 사업체 사장보다 훨씬 많다. 여기에다 사회로부터 받는 따가운 눈총 또한 견디기 어렵다.
수해가 나도 골프장이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농약 및 환경오염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역시 골프장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마치 모든 문제가 골프장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시각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골프장 사장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긍지는 커녕 보람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가능하다면 다른 직업으로 바꾸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인사도 있다. 골프업계에서는 전문경영인으로 꽤나 알려진 L사장은『최근엔 골프장 사장이라고 떳떳하게 내세울 수가 없다. 골프장이 환경오염이나 농약공해의 주범으로 사회에 인식되어 있어 친구조차 만나기가 껄끄럽다』고 실토한다.
현재 국내에서 운영중인 골프장은 대중골프장 13개를 포함, 모두 69개이며 건설중이거나 허가난 곳을 합치면 골프장 총수는 1백89개에 달하고 있다. 이중 태릉·남성대·남수원CC 등은 군에서, 제일·한성·인천국제·제주·레이크사이드·가야CC 등은 재일 교포가, 뉴서울(문예진흥원)·88(보훈처)·중문(관광진흥공사)CC 등은 공공기관에서 각각 운영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대기업을 포함한 기업체에 속해있다.
경주조선은 라이프그룹, 관악은 대농그룹, 남서울은 삼양통산, 뉴코리아는 현대를 비롯한 코오롱 등 4개 그룹, 프라자와 설악프라자는 한국화약그룹, 안양과 동래는 삼성그룹, 용평은 쌍용그룹, 오라는 대림그룹, 춘천은 두산그룹, 한일은 한진그룹, 중부는 애경유지, 태광은 태광산업그룹, 양지는 무림제지그룹이 각각 계열기업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때문에 오너가 직접 운영하는 골프장은 골드CC를 비롯, 10여개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골프장이 낙하산 식으로 임명된 사장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군장성이나 고급공무원에서 퇴역한 사람이나 대기업에서 파견된 인사, 골프장 오너의 친인척이 골프장 사장자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현 골프장사업협회 회장이자 한성CC 대표인 김진홍씨는 외교관 출신이고 도고CC의 송도영 사장은 안기부, 동서울CC의 배옥광 사장은 해군, 남서울CC의 조영일 사장은 공군, 기흥CC의 옥기진 사장은 경찰출신이다.
그런가 하면 아주 소수이긴 하지만 언론인출신도 있다.
뉴서울CC의 이정배 사장은 중앙일보를 거친 문공부출신이고 춘천CC의 박용민 사장은 합동통신 부국장을 역임했고 뉴코리아의 김성림 사장은 경향신문 사회부장을 지냈다.
이때문에 국내 골프역사가 70년에 이르고있지만 아직까지 전문경영인시대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골프장 사장의 효시를 업계에서는 사단법인 서울컨트리클럽의 초대이사장을 지냈던 고 이정용 옹으로 꼽고 있다.
해방 후 남한에 주둔하고있던 미군의 고급장교들이 주말에 골프를 즐기기 위해 일본을 왕래하는 것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이 골프장건설을 각료들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당시 외자청장을 맡았던 이정용씨가 중심이 되어 적극 추진, 1950년5월 서울근교의 군자리(현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국내최초의 정규골프장이 개장되었다.
56년 부산CC, 66년 뉴코리아·육사(현 태릉)CC, 68년 안양CC가 차례로 개장됐으나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골프는 상류사회의 고급사교장 성격이 강해 골프장 사장자리도 대단한 자리로 인식되었었다.
그러나 70년대(14개 골프장 개장)와 80년대(19개 골프장 개장)들어 골프장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골프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골프장 사장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격하되었고 90년대 들어 골프장사업에 찬바람이 불자 요즘은 골치 아픈 자리로 전락했다.
골프장 사장들은 오너의 눈치를 살펴야 함은 물론 회원들과 압력기관의 청탁성 부킹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세금·환경문제 등도 직접 뛰어야 한다.
이 때문에 골프장 사장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잠시도 쉴 틈 없이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골프업계에서는 전문경영인의 한사람으로 꼽히고있는 신설 서서울CC의 이영회 사장의 하루를 살펴보면 골프장 사장이 얼마나 바쁜 하루를 보내고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장은 아침6시면 어김없이 서울 한강로에 있는 집을 나서 완공을 앞두고있는 경기도 파주의 현장으로 향한다. 이 사장은 승용차 속에서 당일일정을 챙기고 현장에서 지시해야 할 일을 메모한다. 7시 현장에 도착한 직후 골프장을 한바퀴 돌아본 후 8시에는 간부회의를 소집, 당면문제를 듣고 작업을 지시한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이 사장은 곧바로 공사현장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작업진척을 챙긴 후 사무실로 들어와 결재를 하는 한편 메모지를 들춰 전화를 걸어준다.
오후에는 파주군청에도 들르고 수원의 경기도청도 방문, 준공검사에 따른 환경영향평가 등을 상의하기도 하고 때로는 환경처·체육청소년부 등을 찾아가 어려움을 하소연하기도 한다. 저녁에 외부손님을 접대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면 오후9∼10시. 사무실에서 간부들이 메모해놓은 안건 등을 챙겨 집으로 퇴근하면 자정이다.
그런가 하면 골프문화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골프장 사장자리를 박차고 나간 인사도 있다. 올해 초 88CC를 그만둔 김신배 전 사장이 주인공.
30년 동안 군 생활을 마치고 소장으로 예편한 김씨는 금오공대 학장을 거쳐 89년 보훈처가 운영하는 88CC의 사장직을 맡았다. 김씨는 취임하자마자 밀어닥치는 지도급 인사들의 부킹청탁에 혀를 내둘렀고 회원중 절반 이상이 일년동안 단 한번도 주말에 라운딩하지 못한 사실에 놀랐다. 이때부터 김씨는 고위관리들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의 청탁을 거부하는 한편 회원중심으로 주말부킹을 운영, 골프장을 일약 명문으로 올려놨으나 주위의 압력에 항상 시달려야했다. 김씨는 급기야『압력을 넣어 부킹하고 특혜를 요구하는 골프 치는 지도급 인사들의 행태로 보아 우리나라가 민주화·선진화되기는 틀렸다』는 말을 남기고 사임하고 말았다.
월급쟁이 골프장 사장이 가장 곤란을 느끼는 문제는 부킹. 골프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주중 부킹까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지자 골프장 사장들은 청탁성 부킹을 견디지 못해 아예 전화를 받지 않으며 일부 골프장의 경우는 사장전용의 핫라인을 설치해놓고 있다. 또 일부 골프장의 경우 부킹을 아예 오너회사에서 직접 챙기는 경우도 있어 골프장 사장은「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기도 한다.
골프장 사장들의 월급은 판공비를 포함, 월3백만∼4백만원이지만 결코 본인들은 하는 일에 비해 많은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남들이 다 쉬는 공휴일과 주말에 더 바쁜 것은 물론 거의 연중무휴로 근무하는 자리여서 다른 사장자리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한달에 1∼2회 라운딩하는데 그것도 대부분이 접대성이다. <임병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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