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년 동경대회|신문준-금단 남북부녀 눈물의 상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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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금단아!』『아바지!』
6·25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된 후 첫 부녀상봉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북한 육상스타 신금단(당시 26세)과 남한 신문준(당시 48세·83년 작고)씨의 만남은 또 한번 남북분단의 아픔을 온 국민에게 안겨주었다.
1964년 10월9일. 동경올림픽 개막 하루 전날인 이날 동경의 조선회관에선 대회참가를 보이콧하고 철수하는 북한 팀의 신금단과 현해탄을 건너온 신문준씨가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만났다.
1·4후퇴 때 처자를 두고 단신 월남한 신씨는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혈육을 13년만에 만나 한동안 할말을 잊은 채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렸다.
상봉시간은 불과 7분. 니가타행 기차를 타야 하는 신금단은 북한선수단 임원들의 독촉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야 했으며 신문준씨는 우에노 역까지 따라가면서『금단아!』만 외치며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나중에 밝혀진 얘기로는 아버지 신씨는 딸에게 귀엣말로『나를 따라 서울로 가자』고 두 번이나 속삭였고 딸은 금방이라도 따라 나설 듯한 눈치만 보였을 뿐 끝내 끌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부녀상봉에 관여했던 관계자들은 오히려 신씨가『딸을 따라가겠다』고 나설까봐 조바심했다고 회고.
이들 신씨 부녀상봉은 63년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가네포(GANEFO·신생국 경기대회)에서 신금단이 여자 육상2백·4백·8백m를 석권하면서부터 예견됐었다.
신문에서 신금단의 기사를 본 신씨가 자신의 딸임을 확인하기 위해 대한체육회 주선으로 동경으로 건너갔고 딸은 북한선수단 일원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것.
남북선수단의 노력으로 당초 부녀상봉을 신금단의 경기가 끝난 후 주선키로 했으나 북한선수단의 돌연한 철수로 이날 갑작스레 이뤄진 것이다.
가네포 출전선수들에 대한 IOC의 징계로 신금단이 올림픽 출전자격을 상실, 이에 불만을 품은 북한은 주최측이 DPRK대신 NORTH KOREA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명분 아래 대회개막 전날 선수단을 철수해버린 것이다.
당시 군사혁명정부는 교포들이 많이 살고있는 일본에서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올림픽이 열리는데다 북한이 대규모선수단을 파견하는 것으로 알려지자 이에 맞서기 위해 2백24명(선수 1백65·임원 59)의 매머드선수단을 출전시켰다.
한국선수단은 주최국 일본· 미국· 소련·호주에 이어 다섯번째로 큰 규모였으나 성적은 은메달 2개(레슬링 장창선·복싱 정신조), 동메달 1개(유도 김의태)로 종합 27위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올렸다.
한국의 당초목표는 금메달 3개 정도.
그러나 첫 금메달 후보였던 복싱 플라이급의 조동기가 준결승에서 소련선수에게 어이없는 실격패를 선언 당하자 흥분한 이규환(36년 베를린올림픽 일본대표) 감독·노병렬 코치가 링에 올라가 40여분간 점거소동을 벌이다 출전정지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 때문에 금메달 후보였던 밴텀급의 정신조는 감독·코치 없이 싸웠으나 결승까지 승승장구했다.
정신조의 결승상대인 일본의 사쿠라이 다카오는 국내 정신조의 라이벌인 박희도에게 졌던 경력을 갖고있어 금메달은 따논 당상처럼 보였으나 결과는 충격의 2회 RSC패. 정신조는 준결승전에서 오른손을 다쳐 마취주사를 맞으며 결승에서 사력을 다했으나 끝내 주저앉고 만 것이다. <김인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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