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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납치(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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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동은 납치범들의 천국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들의 납치 기술은 세계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아랍인들은 납치극을 벌이면서도 『인샬라!』를 외친다고 한다. 「알라신의 뜻대로」라는 뜻이다. 알라신이 납치를 하라고 시킨다는 뜻인지 아리송하다.
납치사건은 주로 정치적 목적에서 발생하는 것이 상례지만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75년 12월21일 빈에서 발생한 OPEC대표단 납치사건때 인질로 잡혔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장관과 이란의 내무장관 등 15명은 몸값 5천만달러를 내고 풀려났다. 납치사건이 가장 성행했던 것은 80년대 중반이었다. 레바논의 각 종파간에 주도권 다툼이 가열하기 시작한 84년부터 2,3년간 각 파벌들은 자파의 이익에 반대되는 나라 사람들을 경쟁하듯 납치했다. 한국의 도재승서기관도 그중의 하나였다. 86년 9월 파키스탄의 카라치공항에서 발생한 미 팬암기 납치사건은 최악의 비행기 납치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30여명이 죽고 1백50여명이 다친 대참극이었다.
당시 레이건 미국대통령은 아랍의 납치범들에 대해 강경입장을 고수했다. 어떤 목적이나 명분으로도 납치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납치범들의 정치적 요구를 번번히 묵살했음은 물론이다. 레이건의 그같은 태도때문에 애꿎은 인질들이 목숨을 잃은 일도 종종 있었다. 납치·인질을 최대의 폭력으로 간주하고 불법화해오던 미국이 느닷없이 납치를 합법화하는 결정을 내려 여러나라들이 시끄럽다. 미 연방대법원이 멕시코인 마약범죄 용의자를 납치해 미국법정에 기소한 미 수사당국의 조치에 대해 합법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당사국인 멕시코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캐나다·스위스·볼리비아·아르헨티나 등 여러 나라들은 자국인들이 미국의 수사관에 의해 납치되는 경우 자국의 법적 조치로 맞서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미국의 「합법적」납치는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마약문제로 오랫동안 골치를 썩여온 미국이 새로운 고민거리를 스스로 만든 셈이다. 납치를 최악의 폭력으로 간주해온 미국이 이제 「경우에 따라서는 납치도 합법화할 수 있다」는 자가당착적인 선언을 할 것인지 궁금하다.<정규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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