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첫 쌀 수출 발목 잡는 농림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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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에서 친환경농법으로 쌀을 재배하고 있는 덕양농산영농조합 이원일(65) 대표는 요즘 속이 바짝바짝 탄다. 스위스에 친환경 쌀 200t을 수출하기로 했으나 농림부 장관의 허가가 5개월째 나지 않아서다. 평소 한국 쌀을 세계적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품은 이 대표가 쌀 수출의 가닥을 잡은 것은 지난해 9월. 스위스 소형 마트에 농산물을 대주는 현지 도매상과 연락이 닿았다. 유럽에서 한국산 쌀을 팔아보려 하는데 샘플을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3월 20㎏짜리 쌀 10포대를 보내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일본 쌀에 비해 품질.가격이 모두 뛰어나다"며 당장 200t 수출계약을 하자는 것이었다. 어림잡아 2400가마 7억원어치였다. 신바람이 난 이씨는 바로 쌀을 보내겠다고 회신한 뒤 수출 절차에 들어갔다가 발목이 잡혔다. 쌀 수출 때는 반드시 농림부 장관 추천서를 받도록 한 양곡관리법 제12조 때문이었다. 이씨는 "농림부 장관의 추천서를 신청했지만 농림부는 다섯 달째 기다려 보라는 말만 하고 있다"며 "스위스 도매상이 계약을 철회할까봐 밤잠을 못 자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해방 이후 첫 국산 쌀 수출이 낡은 법 규정에 막혀 무산 위기에 처했다. 농림부 관계자조차 "현행 양곡관리법은 과거 쌀이 부족하던 시절 쌀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제정한 것이어서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그런데도 농림부는 쌀 수출을 한번도 승인해 준 적이 없어 추천서 양식조차 새로 만들어야 하는 상태다. 농촌경제연구원 박동규 연구위원은 "현재 국내 쌀 재고량은 700만 섬으로 적정 수준인 600만 섬을 훨씬 초과했다"며 "쌀 수출을 막을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 쌀 수출 왜 막나=1980년대까지는 식량 자급률이 낮았기 때문에 쌀은 물론 쌀 가공식품도 수출을 금지했다. 90년대 쌀 소비량이 급격히 줄어 쌀 자급률이 100%에 근접하자 쌀 가공식품은 수출이 허용됐다. 그러나 쌀 수출은 세계무역기구(WTO)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때문에 계속 금지했다. 쌀 수출국이 되면 자칫 UR 협상에서 쌀 시장 개방을 거부할 명분이 약해질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쌀에 대한 집착이 강한 '국민정서법'도 쌀 수출을 막았다. 게다가 쌀을 수출하겠다는 농민도 없었다. 이번에도 농림부는 연말에 재개될 WTO 도하라운드 협상 때문에 쌀 수출 승인을 꺼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한 해 20만t의 외국 쌀을 수입하고 있다. 2014년에는 연간 40만t에 이를 예정이다. 이 때문에 몇백 t 정도를 수출한다고 한국의 쌀 수입국으로서의 지위가 약화할 것이란 농림부 주장은 기우라는 지적이다. 더욱이 북한에는 한 해 40만t씩 쌀을 지원하면서 외국에 수출하는 것만 막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 쌀 수출 전망 밝다=최근 유럽에선 유전자 변형(GMO) 식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GMO가 많은 미국.중국 쌀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하고 있다. 경기도청 농산유통과 김두식 사무관은 "최근 유럽에선 미국과 중국 쌀의 인기가 시들하고, 일본과 한국 쌀에 대한 관심은 커지고 있다"며 "우리 쌀은 일본 쌀과 비교해 가격은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맛이 비슷해 수출길이 밝다"고 말했다.

정경민.박혜민 기자

◆ 양곡관리법=식량이 부족하던 시절, 쌀.보리 등 양곡의 수급을 조절하기 위해 1950년 제정한 법이다. 초기에는 쌀 증산에 주력했으나 90년대 들어선 수입 쌀 관리에 초점을 맞췄다. 쌀.보리 등 식량 작물은 생산.유통.관리를 정부가 맡도록 했다. 96년 개정안에 양곡 수출 규정이 처음 만들어졌지만 농림부 장관 추천을 받도록 해 사실상 승인제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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