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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1)제88화 형장의 빛(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사형수 고금석>
고금석, 사형집행당시 27세. 86년8월14일 서진 룸살롱 폭력배 살인사건의 행동파로 검거되어 89년8월4일 사형 집행되었다.
86년 한여름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날, 강남유흥가 서진 룸살롱에서 「서울목포파」와 「목포맘보파」20여명이 조직의 복수를 위해 생선회칼·일본도·야구방망이 등으로 혈전을 벌여 4명이 살해된 이 사건은 그 범행의 끔찍함으로 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 후 유도대 4학년이었던 고금석은 이틀 후 자수했으나 살인 및 범죄단체 구성죄가 적용돼 사형이 확정됐고 동료였던 김동술(당시 26세)과 함께 87년 의왕시로 옮긴 서울구치소에서 처음으로 사형집행 되었다.
고금석은 구속직후 천주교에 귀의했다. 서울구치소를 직접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에게 견진성사까지 받았던 것. 아픈 대중 속에까지 찾아가 세례를 준 김 추기경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형수에서 무기로 감형된 최재만을 통해 고금석을 만난 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개종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천주교신자인 당신의 영혼을 관리할 자신이 없다』고 솔직히 털어놓자 고금석은 『저는 시간이 없습니다. 스님, 내 마음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나를 확인하고 나에 대해 정확히 가르쳐줄 수 있는 종교는 불교라고 생각하고 개종을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매주 그를 만났다. 어느 날 무릎사이로 피가 배어있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나 때문에 죽은 이들을 위해 3천번씩 참회의 절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무릎이 으깨어져도 참회의 절을 계속하겠습니다. 삶·죽음이 무엇인지 깨닫고 악행을 중지하게 된 사형수가 된 걸 다행으로 알고 행복하게 죽음을 맞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머지않아 죽어 썩어질 목숨, 남의 목숨을 빼앗은 몸이 하루세끼를 먹을 수 없다며 하루한끼를 먹고 자신의 식사는 다른 재소자에게 주었다. 또 그에게 들어간 영치금을 모아 어린이를 낳은 여 재소자에게 우유와 기저귓감을 주기도 하고 맹인·나환자·소년소녀가장에게 성금으로 나눠주었다. 특히 어느 잡지에 실린, 전교생이 28명뿐인 강원도 정선군 백전국교 용소분교 어린이들에게 매달 학용품을 사보냈다.
그는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좌선을 했다. 나와 함께 고금석을 면회간 선배인 체육대학의 어느 교수는 고금석의 의연한 모습을 보고 『어려운 일 만날 때마다 널 생각하겠다. 극한의 시간을 잘 관리하는 네 모습이 보기 좋구나』라며 감탄했다. 가장 성공한 교수와 가장 실패한 사형수 중에 오히려 사형수가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있는 두 사람의 만남에서 사람이 처한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배웠다. 어떤 세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은 좌선에서만 나올 수 있다.
아무튼 고금석과 어릴 때부터 사귀어온 윤경희씨와의 옥중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허형구 법무장관 면회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집행을 미뤄달라』는 내 요청에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던 터라 고금석의 사형집행에 입회하라는 전갈은 뜻밖이었다. 그를 위해 구명운동을 했던 나였기에 그의 마지막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에서 택시를 대절하여 밤새도록 달려 서울구치소에 도착하니 8월4일 아침7시30분.
어느 교도관에게 들으니 고금석은 눈과 콩팥을 아무도 모르게 기증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휴가철로 미처 의사와 약속이 되지 않아 기증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한 사람의 고귀한 선행이 무참히 깨어진 것에 나는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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