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영 옐로페이퍼와 다이애나/배명복 파리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영국 여왕이 20년만에 프랑스를 공식방문했다.
찰스황태자와의 가정불화로 다이애나비가 다섯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었다는 충격적 보도로 영국 전체가 들끊고 있는 가운데 남편 에딘 버러공과 함께 9일 파리에 도착한 엘리자베스2세 여왕은 가정사의 깊은 우환에도 불구하고 40년째 왕위를 지켜온 군주다운 기품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3백마리의 말이 이끄는 기마행렬의 장엄한 호위속에 파리시내 샹젤리제를 무개차로 지나며 66세의 노여왕은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특유의 우아한 미소로 답례했다. 여왕의 미소를 먼 발치서 지켜보면서 미소속에 감춰졌을 여왕의 인간적 고뇌를 새삼 되씹어 보게 된다.
지난 주말부터 영국의 대중지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다이애내비의 자살소동에 얽힌 얘기들은 인간적으로 차마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충격적 내용들이다. 남편의 무관심과 냉대,왕실생활에서 오는 중압감에 못이겨 임신 3개월만에 층계에서 투신한 것을 비롯,장식장 유리에 몸을 날리고 레먼 써는 칼로 자신의 몸을 자해하고 면도날로 손목을 자르기도 했다고 영국 언론들은 무슨 「세기의 특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바람(?)나게 보도하고 있다.
영국의 대중지들이 다이애나비의 자살 기도 소문을 다루는 것을 보면 마치 썩은 고기에 달려드는 까마귀떼를 연상케 한다. 당사자들이 겪을 인간적 고통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은채 근거없는 폭로경쟁을 서슴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지켜온 격조와는 달리 선데이 타임스지가 25만파운드(약 3억5천만원)을 주고 한 대중지 기자로부터 판권을 인수한 책(『다이애나,그녀의 진실한 이야기』)이 이 신문에 발췌돼 실리면서 시작된 영국 대중지들의 무분별한 폭로경쟁은 정말 점입가경이다.
더 선지는 1면부터 시작,모두 10페이지를 찰스황태자 부부의 불화에 할애,별거에 합의했다고 특종(?)보도하고 있는가 하면 데일리 익스프레스지는 이혼발표가 임박했다고 한걸음 앞서가고 있다.
『언론이 인간의 기본적 가치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조지 케레이 캔터베리주교의 개탄이 아니더라도 영국의 옐로 페이퍼들이 벌이고 있는 이번 소동은 언론의 윤리적 한계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 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