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자의 눈으로 조선 권력을 들여다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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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한국학계에는 한국인들만이 한국학을 이해.연구할 수 있다는 일종의 본질주의가 퍼져 있다."

해외 한국학계의 성과를 꾸준히 소개해 온 이훈상(54.동아대 한국사.사진(左))교수의 지적이다. 제임스 팔레(1938~2006) 전 워싱턴대 교수의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과 마르티나 도이힐러(1935~) 런던대 명예교수의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등 저명한 서구 한국학자들의 책을 두루 번역한 이 교수가 최근 새 번역서를 냈다. 손숙경 동아대 강사와 함께 번역한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일조각)이다. 이 책은 해외 한국학계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에드워드 와그너(1924~2001.(右)) 전 하버드대 교수의 연구 성과를 집성한 것이다. 번역에 착수한 지 15년이 지나 출간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외부와의 소통을 끊고 내부 이데올로기만 재생산하는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고 국내 한국학 연구 풍토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와그너의 성과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그가 고(故) 송준호 전 전북대 교수와 함께 37년 동안 추진한 '문과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그는 조선의 지배 엘리트 10만명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여기엔 문과 급제자 1만4607명과 생원 진사 합격자 4만649명이 포함돼 있다. 대단한 업적이다."

-와그너는 조선이 500년 이상 생명을 유지한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왕조라는 사실에 주목한 연구자로 손꼽히는데, 그 원동력을 무엇으로 보았나.

"우선 과거 급제자가 한양을 중심으로 소수 가문에 집중되고 있음에도, 별다른 배경을 갖지 못한 가문들이나 서북 지역과 같은 주변 지역에서도 급제자가 다수 배출된 사실에 주목했다. 또 사화(士禍)에 대한 해석도 중요하다. 사화는 일제가 한국 민족의 고질적인 당파성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내세워졌는데, 이와 달리 와그너는 오히려 이 사화가 조선왕조의 원숙한 통치 이념의 발전과 활력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했다. 권력의 배분과 정치 대립의 해소를 위한 효율적인 방식을 마련함으로써 왕조가 장기 지속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와그너와 국내학계 사이의 차이는.

"일본의 식민사관에 맞서 국내 학계는 조선왕조도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내재적 발전론이나 자본주의 맹아론과 같은 가설이 그것일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신분제 해체론 등과 같은 논의가 나왔는데, 이에 대해 와그너 교수는 생각을 달리했다. 그는 양반 중심 사회가 얼마만큼 강인하게 지속되었는가에 주목했다. 더불어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갈등과 관련하여 조선전기에 마치 지배 계층의 교체가 이루어진 것과 같은 통설도 비판하고 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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