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 법전 한 손엔 메스 약자보호·인술 펴기 40년|의사 겸 변호사 전용성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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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전용성옹(80·서울 돈암동)은 「한 손에는 법전을, 다른 한 손에는 메스를 들고」살아온 사람이다. 변호사이자 의사는 전옹이 국내에 유일한 인물이다(비슷한 인물로 변호사이자 치과의사인 조기향씨가 있다).
전옹의 남다른 이력은『한 때 큰일(대통령)을 꿈꿨고 지금도 고려할 수 있다』는 그의 큰 포부에서 시작됐다.
경남 함양이 고향인 전옹은 15세가 되던 해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사촌형의 도움으로 도일, 도쿄근처의 후카가와에서 고학으로 중학교와 의과계열의 전문대학을 마치고 26세에 귀국, 의사국시에 합격해 1939년부터 경성제대부속병원(서울대병원의 전신) 내과에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의사생활을 시작했다.
『불우한 이웃을 도와라』는 선친의 말씀에 따라 의술을 펴온 전옹은 서른이 넘어설 무렵「인술도 좋지만 좀 더 큰 차원에서 이웃을 돕는 것은 정치라는 생각이 들어 46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시험을 치러 입학했다. 대학 4학년 때 제1회 고등고시 사법·행정 양과에 응시한 것은 정치에의 꿈을 실현시키는 첫 시험무대였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고 이런 고배는 여섯 번이나 이어졌다.
55년 찾아온 「7기」는 사실 적지 않은 고통 속에 얻어진 것이었다. 29세에 결혼해 처자식과 떨어져 서울·대구근교의 점 등에 찾아가 고시 공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법시보를 거쳐 서울지방법원에서 67년까지의 판사생활을 전옹은 「먹고 살기는 어려웠지만 죄지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관용을 베풀었던 시기」로 정리한다. 판사재직시에는 고용의사를 두고 병원을 운영해 『동료 판사들과는 달리 경제적 어려움은 거의 못 느꼈다』는 그는 『생활이 어려워도 양심을 팔지 않았던 당시의 판사상은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전옹은 또 나름대로 선도 우선의 사법 처리 원칙을 갖고 있었다. 『웬만한 범죄면 벌금형이 좋아요. 범죄자를 교도소에 보내봤자 교화되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마 판사재직기간 중 나만큼 벌금형을 많이 때린 사람도 드물 거예요.』10여년의 판사생활을 마치고 전옹은 본격적으로 변호사·의사 겸업을 시작했다. 그가 병원 겸 법률사무소로 쓰고 있는 서울 동선동의 5층 짜리 건물 3층에 위치한 그의 방을 들어서면 히포크라테스상과 형평의 저울이 나란치 걸려있다. 또 한쪽 벽에는 법률 관련 서적이, 또 다른 쪽에는 의학관련서적이 벽을 채우고 있다.
변호사로서 1주일에 한 건 정도 소송을 처리하고 의사로서는 하루 한두 시간 짬을 내 자신을 찾는 환자를 진료한다. 형사·민사사건을 가리지 않고 받지만 의사라는 또 다른 신분 때문에 지금까지 수십건의 의료사고 관련 소송을 맡았다.
『물론 의료사고 송사라 해서 공정성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말았던 의료사고 소송은 모두 의뢰인이 의사였고 의사가 승소한 때가 많았습니다. 이는 의료 사고시 환자측에서 의사의 과오를 입증해야 하는 우리 법체계의 특징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의술은 상술이 아닌 인술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전옹은 40여년 가까이 병원을 운영해왔지만 처음 2층이던 병원건물을 20여년 전 현재의 5층으로 증축한 것 외에는 축재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흔히 하나 따기도 어렵다는 사자 자격증을 두개나 갖고 있지만 이를 이용해 큰돈을 벌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돈암동 주변의 가난한 사람이 병원을 찾아오면 돈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전에 변호사 활동을 활발히 했을 때는 몇 건의 무료변론을 해준 적도 있다.
80을 넘긴 요즘 그가 가장 자랑으로 삼는 것은 건강이다. 새벽에 같이 배드민턴을 치는 동네 처녀들이 『원장님은 아직도 이팔청춘』이라고 치켜세울 때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도 건강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특별한 지지기반이 없어 그렇지 이 정도 건강이라면 지금도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누누이 말할 만큼 건강에 자신을 보이는 것은 나름대로의 비결이 있어서다. 다동(많이 움직임) 다수(채소를 많이 먹음) 적광(적당히 빚을 쬠) 소식·정수(깨끗한 물을 마심) 선기(신선한 공기 호흡)의 원칙이 그것이다. 십수년을 계속해온 배드민턴도 건강유지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지난 84, 85년에는 전국배드민턴대회 노년부 복식에서 연거푸 우승한 경력도 갖고 있다.
오전3시 기상해 냉수마찰 등을 끝낸 후 한 두 시간의 독서·진료·변호업무 등으로 일과를 보내다 오후 9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든다는 전옹은 한 때 정치지망생으로서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인지 TV프로로는 유일하게 시사토론 등을 즐겨본다. 또 그는 하루에 한가지 선행, 예컨대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라도 해야한다고 믿는데 이는『올바른 정치인은 말보다 실전이 앞서야한다』는 그의 신념과도 맥이 통하는 듯하다.
지금은 부인 박준희씨(73)와 단둘이 병원 옆에 딸린 집에서 살지만 의사·교수 등으로 장성한 l남5녀가 번갈아 가며 찾아오는 것도 전옹에게는 큰 행복이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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