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불복 무시되는 경찰/김우석 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대통령의 임기를 8개월여 남기고 공직사회의 누수현상·기강문란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경찰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경찰청 수뇌부는 3일 오후 늦게 구내방송과 기능별 연락체계를 동원,수사·보안·정보분야 경찰관을 제외한 정복근무부서 경찰들은 출퇴근때 근무복(경찰복)을 입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4일 오전 경찰청에 근무하는 8백여 경찰관들은 대부분 평상복(사복)을 했다. 경찰청 수뇌부는 예기찮은 사태에 당황,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부심하다 지시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지난주엔 경찰청 근무직원들에게 점심시간에 가급적 외식을 삼가라는 상부의 지시가 거의 지켜지지 않아 유야무야 됐었다.
문제의 심각성은 경찰복장을 하고 출근하느냐,점심식사를 구내식당에서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사회에서 상부의 지시가 하부층에 먹혀들지 않는 분위기다.
제복을 입고 근무하는 경찰조직은 지휘체계가 다른 어느 공무원조직보다 확고해야 하는 특성이 있다.
이와 같은 조직특성을 지닌 경찰내부에 상부의 지시를 하찮게 여기는 기류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과 재산보호 임무를 위탁한 국민의 입장에서 큰 불안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같은 사건의 1차적 책임은 지시를 거부한 하위직 경찰관에게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구차한」변명도 사태해결에 참고가 될 수 있을듯 하다.
즉 경찰관이라는 신분을 자랑스럽게 이웃에게 밝히고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할 분위기나 기분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또 흔히 보수체계나 사기·명예회복 등을 하위직 경찰관의 큰 애로로 생각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바람은 최소한 일반국민의 반이라도 휴일과 휴식을 즐기고 싶은 근무여건의 개선이라는 주장이다.
결국 이같은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고 나아가 경찰조직의 공고화를 위해서는 근무여건·인사체계 등 하위직 공무원들의 가려운 곳을 찾는 일이 우선돼야 하리라 본다.
어쨌든 이같이 심각한 문제를 내부에 안고 있는 경찰조직이 『수사권 독립』운운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