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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의 잣대를 버려라-김욱동 교수, 이성욱씨 글에 재반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장편소설 『내가 누구인지…』는 기존의 여러 소설을 짜깁기한 「혼성모방」기법을 취했다는 작가 이인화씨의 주장에 평론가 이성욱씨는 「정당성을 잃은 인용은 표절 인뿐」이라고 반박했다(중앙일보 15, 18, 21일자·일부지방 16, 19, 22일자 13면 보도). 이 같은 작가와 평론가 사이의 논쟁에 김욱동 교수(서강대 영문과)가 이성욱씨를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주】
한 작가 자신의 작품에서 사용하는 기교는 필연적으로 그의 세계관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때문에 기교는 문학사를 통하여 가장 핵심적인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문학사는 곧 주제나 내용의 역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표현하는 기법이나 형식의 역사인 것이다.
최근 이인화씨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표절한 소설로 화제가 되고 있다. 작가자신이 솔직히 밝히고 있듯이 사실 이 작품은 멀게는 니체로부터 가깝게는 공지영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한 단락, 또는 그 이상을 비교적 자유롭게 빌려온다. 그리하여 몇몇 비평가들은 이 소설을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라 남의 작품을 단순히 표절, 「짜깁기한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성욱씨는 그동안 일련의 글을 통하여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기존의 작품에서 「베껴놓은」이인화씨의 소설이 차용의 범위를 넘어 『표절 혹은 도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20세기 후반을 특징짓는 문화 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을 적극 수용해온 한사람으로서 필자는 이인화씨의 창작방법은 예술적으로 매우 타당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윤리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전적으로 독창적인 작품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존재하지 않듯이 예술작품에도 새로운 작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입장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리얼리스트들이나 모더니스트들이 그동안 주장해온 예술의 독창성이나 창조성에 깊은 회의를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독창성이나 창조성은 어디까지나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예술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은 흔히 이러한 예술적 입장을「패스티시(혼성모방)」라는 기법을 통하여 표현한다. 이탈리아어의 어원 「파스티치오」라는 말이 가리키고 있듯이 이용어는 마치 헝겊으로 기운 누비이불처럼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잡다하게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심미적 범주중의 하나인 「상호 텍스트성」은 바로 이러한 패스티시기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여기서 상호 텍스트성이란 어느 한 문학텍스트가 다른 문학텍스트와 맺고있는 상호관련성을 말한다. 이 이론을 문학에 처음 도입한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모든 텍스트는 마치 모자이크와 같아서 여러 인용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어떤 이론가는 「유희(play)」라는 말과 「표절(pla-giarism)」이라는 말을 서로 결합하여 아예 「playgiarism」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멀게는 고대 희랍시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르네상스시대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거쳐 가깝게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작품은 다 남의 작품에서 「베껴온」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서력 기원전 2천년 경에 씌어진, 그러니까 아직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집트 파피루스 고문서에는 『만일 내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구절, 아직 남이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구절이 적혀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인화씨에 대한 이성욱씨의 비판은 리얼리즘 미학의 옹호나 거의 다름없다. 적어도 묵시적으로 이씨는 문학작품이 텍스트의 내적 메커니즘보다는 오히려 텍스트 밖의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을 재현하는 임무와 기능을 담당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인화씨의 작품은 이러한 현실 재현과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다. 아무리 현실 재현을 거부하는 반리얼리즘적인 자기 반영적 텍스트라 하더라도 모든 문학작품은 언어를 매체로 삼는 이상, 불가피하게 텍스트 밖에 존재해 있는 현실 세계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인화씨 자신도 분명히 밝히고있듯이 이 작품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주제인 존재론적 정체성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를 취급하는데 작가는 혼성모방과 상호 텍스트성이라는 가장 적절하고 유용한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이보다 더 효율적인 다른 기교가 있었다면 아마 작가는 그 기교를 사용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내가 누구인지…』는 우리 문단에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며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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