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가 발 뻗고 자는 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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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2면

지난해 국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1073건이다. 법정형이 사형ㆍ무기ㆍ5년 이상의 징역이고 공소시효가 15년이지만 살인은 줄어들기는커녕 증가하는 추세다. 오히려 수법이 교묘해져 수사가 미궁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살인사건에서 부검(剖檢)이 사건 해결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 1월 부산고등법원이 판결한 살인사건이 좋은 예다. 2003년 10월 9세 여자아이가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하던 도중 숨졌다. 익사로 보기 쉬운 사고였다. 그러나 수영장 안전요원은 아이가 갑작스레 사망한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경찰도 수영장 측의 과실을 밝히기 위해 부검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검사에게 밝혔다. 아이 엄마 A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부검을 지시했다. 독극물 검사 결과 치사량의 시안산칼륨(청산가리)이 검출됐다. 수영장에서 시안산칼륨에 중독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수사 과정에서 아이가 사망 직전 “수영장 탈의실에서 엄마가 준 것을 맛있게 먹었다”고 자랑한 사실이 목격자 진술에서 드러났다. 또 사건 바로 전날 아이가 보험에 가입한 것이 확인됐다.A씨는 끝내 범행을 부인했으나 1심과 항소심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의혹은 더 있다. A씨 남편은 2년 전 집에서 커피를 마신 뒤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갔고 진단할 시간도 없이 사망했다. 의사는 패혈증으로 추정하고 부검을 하지 않았다. 남편 명의로 두 개의 보험에 가입돼 있었고 수혜자는 부인이었다.

게다가 A씨 이웃에 살던 주부 역시 A씨 집에 다녀간 뒤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병원에서는 역시 병사로 판단했다. 사망한 여자의 남편은 장례를 치르고 한참이 지나 자신도 모르게 부인이 보험에 가입했고 보험금의 수령자가 A씨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주검도 증거도 모두 없어진 뒤였다.

수영장 사건은 검사가 부검을 지휘했기 때문에 독극물 중독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건은 병원에서 ‘병사’로 처리됐다. 부검을 실시했더라면 두 건의 살인을 막을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멀쩡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경우 검시(檢屍)는 필수적이다. 자살ㆍ타살ㆍ사고사는 모두, 병원에서 사망한 경우에도 미처 진단하지 못했다면 검시해야 한다. 검사는 개인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건에 해당하는 모든 변사체를 검시하도록 명령해야 한다.

국회가 검시에 관한 법률 제정을 검토하고 있다. 검시를 번거롭고 필요없는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자칫 사건의 진실이 묻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살인하기 쉬운 나라’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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