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은 인질 정치 대선후보는 국정 발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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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하려면 진작 (정치권에) 들어왔어야 했는데…그래야 사람들도 모이고 했을 텐데…."

노무현 대통령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대선 불출마가 보도된 1일 오전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 전 총장에 대해 노 대통령이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나라당 '빅2'에 맞서 범여권의 대선 논의를 증폭시켜온 역할까지 무시한 건 아니라고 한다. 노 대통령의 말 속에는 이 같은 심경이 담겼다는 게 주변의 해석이다.

문재인 비서실장도 국무회의 직전 기자들이 "정 전 총장의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중간자 입장에서 좀 어정쩡하다. 우리도 범여권에 포함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곤 "통합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덧붙였다.

범여권의 대선 논의를 보는 노 대통령의 시각은 복잡 미묘하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얘기다.

한 핵심 참모는 "특정 주자들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는 계속하는 것 같다"며 "하지만 일절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참모들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뒤 국정운영 지지율이 30%대로 올랐지만 여전히 '노무현 디스카운트(저평가)'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주자에 대해 입을 열면 유불리가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노 대통령이 하는 것 같다는 얘기다. 또 노 대통령은 후보보다 세력 중심의 논의가 전개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특정인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씨가 최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정치적 신념을 지켜 나가는 게 중요하다"며 "그렇게 했는데 대선에서 패배한다면 그 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현실은 더 어려워졌다.

고건 전 국무총리에 이어 정 전 총장마저 중도 하차하면서 범여권의 대선 논의는 흥행 자체를 걱정해야 할 판이 됐다. 그래선지 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작심하고 한나라당을 비판했다.

4월 임시국회에서 국민연금법.로스쿨법.임대주택법 등이 처리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하나하나가 개혁 입법이자 민생 입법인데 이런 걸 무산시킨 국회가 과연 국회냐"며 "한나라당의 사학법 연계 전략은 인질 정치 내지 파업 정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막강한 뱃심에 대해 놀랍게 생각한다"며 "수십 가지 법안들이 사학법에 전부 발목 잡혔다가 지체돼 발생한 국가적 손실을 세세하게 정리해 국민한테 고발해 달라"고 국무위원들에게 당부했다.

특히 "다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이렇게 발목을 잡아 놓고 자기들이 대통령이 되면 국정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정말 물어 보고 싶다"고 대선 주자들도 싸잡아 비판했다.

한나라당을 향한 노 대통령의 이런 직설적 비판엔 한.미 FTA 타결 이후 부쩍 커진 그의 자신감도 반영된 듯하다. 그는 지난달 30일 '국민화합 기원 법회'에 참석해 "된 고비는 넘긴 것 같다. 앞으로 자신 있다. 분위기 참 좋다. 입이 째지려 한다"고 한 바 있다.

◆ 한나라당 "적반하장"=한나라당은 반발했다. 김형오 원내대표는 "사학법이 국회를 인질로 삼은 것이 아니라 사학법 재개정을 반대한 열린우리당의 무책임한 태도가 국회를 식물.불임 국회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경원 대변인도 논평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적반하장이며 정국 파탄의 원죄를 감추고 국정 실패의 책임을 한나라당에 뒤집어 씌우려는 계산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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