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층 내 집 마련 도움 주려 출발 우량 · 비우량 채권 섞어 부실 소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호 21면

“시원하게 장타를 날린 기분이구먼!”

세계 금융시장의 지뢰… 美서브프라임 스토리

1982년 12월 17일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장기주택담보대출(모기지) 변동금리제법(AMTPA)에 서명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여 년 동안 유지된 모기지의 고정금리 시대가 끝났다. 그 자리에는 도널드 리건 재무장관이 배석했다. 리건은 선거자금을 모아준 ‘월스트리트 친구들’이 주문한 대로 그 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수차례 레이건의 귀에 속삭여 놓았다. 레이건은 리건과 월스트리트 친구들의 소망을 외면하지 않았다. 경쾌한 손놀림으로 그 법에 서명했다.
레이건의 서명 이후 25년이 지난 2007년 현재 미 금융시장에서는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가 진행되고 있다. 영국계 다국적 은행인 HSBC의서브프라임 대출금 중 100억 달러가 지난해 하반기 주택가격 하락으로 부실해졌다는 소식이 지난 2월 미 주택ㆍ금융 시장을 강타했다. 이후 서브프라임 악재가 발생할 때마다 주가가 출렁거리고 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올해 안에 230만 명이 집을 압류당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모든 사람들이 서브프라임 사태가 경제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의 로드리고 라토 총재도 서브프라임 사태가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레이건의 변동금리제법 서명과 현재 서브프라임 사건의 관련성에 주목한다. 25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있는 두 사건은 어떤 관계일까.

고정금리제인 모기지 대출의 금리가 82년 변동금리제로 바뀌어 사채시장의 고리대 주택담보대출이 제도권 시장의 서브프라임이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여기에다 신용위험회피 기법이 더해졌다. 금융회사의 방만한 경영도 한몫했다.

원래 레이건은 당선 직후부터 금융자유화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대공황 이후 뉴딜정책으로 규제의 사슬에 묶여 있던 시장을 되살려야 미국 경제의 경쟁력을 되살릴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당선자 시절인 80년에 고정금리인 예금금리제도가 폐지됐다. 이는 더 높은 금리를 앞세운 은행 간 예금유치 경쟁을 촉발했다. 반면 모기지는 대출시점에 맺은 계약대로 고정금리로 묶여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금융회사는 손해 볼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금융업계는 필사적으로 백악관과 의회를 상대로 로비했다. 모기지 변동금리제를 도입하면 그동안 시장에서 소외된 계층이 한결 쉽게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로비는 성공했다. 금융회사는 수신금리 변동을 주택 구입자에게 그대로 떠넘길 수 있게 됐다. 즉, 무조건 대출 거부 대상이었던 비우량 고객에게도 높은 금리를 받고 모기지를 제공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됐다.

특히 86년에는 세법이 개정돼 신용카드와 자동차 담보 대출의 감세 혜택이 사라졌다. 급전이 필요한 미국 서민들이 감세 혜택이 있는 주택담보대출 시장으로 몰렸다. 금융자유화가 서브프라임 공급 규제를 풀었고, 세법 개정은 수요를 자극한 셈이다.

여기에다 리스크 헤지 기법이 더해졌다. 금융회사가 떼일 가능성이 높은 비우량 고객에게 돈을 꿔주고 안게 된 위험을 처리하는 방법이 80년대에는 없었다. 자산담보부증권(ABS) 발행 메커니즘이 개발됐지만, 이 증권의 위험을 회피하는 테크닉은 없었다. 뮤추얼ㆍ헤지 펀드 매니저들은 서브프라임이 섞여 있는 ABS의 편입을 꺼렸다. 그만큼 서브프라임 시장에 자금 공급이 적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20세기 후반 최고의 금융발명으로 불리는 신용파생상품이 93년에 등장했다. 은행이나 펀드가 보험료(프리미엄)를 내면 채무불이행이 발생할 때 원리금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생겼다(크레디트 디폴트 스와프: CDS). 미 주택도시개발부 산하 도시개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인 케네스 템킨은 “신용파생상품은 서브프라임 급증의 강력한 촉매제”라고 했다.

이런 시스템이 갖춰지자 서브프라임 시장이 마침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91년 10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서브프라임 대출 규모가 급증해 97년에는 6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많은 은행이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고리대 주택담보대출 전문 사채회사를 경쟁적으로 인수했다. 이때 서브프라임(Subprime)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모기지 시장에서 우대금리(Prime Rate)를 적용받는 대출자보다 신용점수가 낮은(Sub) 사람에게 제공되는 대출을 뜻한다.

그런데 아시아 금융위기(97년)와 러시아 채무불이행 사태(98년)로 헤지펀드사인 롱텀캐피털이 주저앉아 자금난이 발생했다. 이 불길은 서브프라임 시장으로 번졌다. 모기지회사 21곳이 단 두 달 사이에 파산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서브프라임 1차 위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던 앨런 그린스펀은 롱텀캐피털 사태에만 촉각을 곤두세웠을 뿐이다. 서브프라임을 사채의 일종으로 보고 외면했다. 사실 부실화 규모도 크지 않아 찻잔 속의 태풍처럼 곧 진정됐다.

『금융투기의 역사』를 지은 애드워드 챈슬러는 “‘망각’은 금융시장 참여자의 숙명”이라고 했다. 주택시장이 호황을 보이자 서브프라임 1차 위기는 곧 잊혀졌다. 서브프라임은 집값이 들썩이기 시작한 2003년(3320억 달러)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지난해 말 현재 이 잔고는 2조5000억 달러에 달했다.

로체스터공대 로버트 매닝(소비자금융) 교수는 “서브프라임 급증은 레이건이 너무 세게 쳐 파열한 골프공 조각이 예상치 못한 지점에 떨어진 것과 같다”고 풍자했다.
저금리 시대 수익률 하락에 시달리던 뮤추얼ㆍ헤지 펀드 매니저들은 앞서 언급한 CDS를 믿고 서브프라임의 자산담보부증권을 마구 편입했다. 희석 과정을 거쳐 비우량 채권이투자적격 채권으로 탈바꿈된 것들이다.

내 집 마련과 거리가 먼 저소득 계층과 갓 이민 와 소득이 불분명한 사람 등에게도 모기지 대출(서브프라임)이 쉽게 이뤄졌다.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셋집을 찾는 사람에게 아예 집을 사라고 부추겼다. 집값은 더 뛰었다. 2003~2006년 사이의 집값 급등에는 이같이 서브프라임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내 집을 장만한 사람들은 집값이 더 오르자 부자가 된 듯 흥청망청 돈을 썼다. 소비 증가는 곧 미국 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선순환이 악순환으로 바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 금융회사 노던트러스트의 선임연구원인 애셔 뱅걸로는 “서브프라임 덕분에 주택시장과 경제가 활성화된 부분이 있다면, 이번 사태로 적어도 그만큼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What`s the news
라토 IMF 총재가 서브 프라임
사태 확산 경고

The debate
“찻잔 속 태풍이다”
vs
“세계금융시장 뇌관이다”

What`s the next
주택담보대출 부실 확대로
미국 소비위축 불가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