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9명의 배심원, 판사와 '솔로몬의 지혜'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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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월부터 검찰이나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조사받는 방법과 법원에서 재판받는 절차 등이 크게 달라진다.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개정 형사소송법과 새로 제정된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배심제)'에 따른 것이다. 배심제는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 판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번에 처음 만들어졌다.

본지는 가상 사건을 통해 새로 바뀐 법의 내용을 풀어봤다. 김일수 고려대 법대 교수,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와 하창우 서울변호사협회장, 곽무근(전 서울서부지검 차장) 변호사, 정한중(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실무위원) 변호사, 현직 판검사 등 법조계 인사 10여 명에게 자문을 구했다(※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사건1=국책은행 간부인 김모씨는 고교 동창인 건설회사 대표에게서 "100억원의 긴급자금이 필요한데 시중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청탁과 함께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김씨는 직장 동료들에게 "빌린 돈"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 변호사와 함께 조사실로=검찰의 소환 통보를 받은 김씨는 변호사와 함께 갔다. 조사실에도 같이 들어갔다. 수사 검사는 김씨에게 "나중에 진술이 바뀔 수 있어 영상녹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변호사가 "원치 않으면 하지 말라"고 말렸으나 김씨는 "문제없다"고 동의했다.

검사가 도중에 갑자기 사생활 문제를 제기하면서 김씨는 당황했다. 그러자 변호사가 "이번 사건과 관련없는 사안인데 의뢰인을 압박하지 말라"고 항의했다. 미국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변호사가 검찰의 수사방법을 문제삼고 나선 것이다. 김씨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3시간여의 조사가 끝난 뒤 검사는 모든 신문 과정을 기록한 영상녹화 테이프를 보여 주며 확인을 요구했다. 김씨와 변호사는 테이프의 편집 여부를 검토한 뒤 서명을 했다. 검사는 다음날 김씨에 대해 뇌물죄를 적용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변호인의 수사과정 참여와 이의제기권이 이번 개정 형소법에 처음 명문화됐다. 현행 형소법에서는 불구속 상태의 피의자가 조사과정에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가 모호했다.)

◆ 배심원에게 무죄 호소=구속된 김씨는 배심재판을 받기로 했다. 배심원들을 상대로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법정에서 김씨는 변호사와 나란히 앉아 필요할 때마다 의견을 나눴다.

검사는 김씨에게 "업체 사람의 부인이 왜 당신 부인의 통장에 2000만원을 보냈느냐"고 추궁했다. 김씨는 "대학 때부터 부부끼리 잘 아는 사이이며 아이들 유학 비용으로 빌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장은 배심원에게 평결을 요구했다. 법정 뒤 평의실에 모인 7명의 배심원 중 3명은 무죄, 3명은 유죄, 1명은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배심원들은 검찰과 피고인의 주장을 다시 한번 검토한 끝에 표결을 통해 만장일치로 무죄 의견을 냈다. 법정에서 김씨의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주장이 배심원들에게 설득력을 가졌던 것이다. 배심원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재판장에게 설명했고 재판부도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씨의 입장에선 자신의 '억울함'을 배심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새로 도입된 배심제는 배심원이 유무죄를 가리는 미국식을 바탕으로 형량을 판사에게 제시하는 독일의 참심제 요소를 섞었다. 그러나 한국식 배심제는 판사가 배심원의 유무죄 판단과 양형 의견과 다르게 독자결정을 할 수 있다. 판사가 배심원의 결정과 달리 선고할 때는 판결문에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

#사건 2=부산의 수입의류 판매업체 대표 정모씨는 재고품 5000만원어치가 사라지자 관리 직원인 최모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정씨 주장을 입증할 수 없다"며 최씨를 불기소했다.

◆ 최후수단으로 재정신청=정씨는 "검찰이 최씨의 동료인 다른 직원이 퇴사해 버려 조사를 못했고 결국 4개월 이상 시간만 허비했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검찰 수사에 문제가 있다"며 고등검찰청에 낸 항고가 기각되자 관할 부산고등법원에 다시 재정신청서를 냈다. 그러나 법원은 검찰에서 수사기록과 증거물을 넘겨받은 뒤 "검찰의 결정에 문제가 없다"며 정씨의 신청을 기각했다.

(※지금까지 불기소 처분에 대한 불복절차는 항고→재항고(대검)→헌법소원(헌법재판소)이었다. 앞으로는 항고→재정신청으로 바뀐다. 일부 범죄에만 허용했던 재정신청이 모든 고소사건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소송 남발을 막기 위해 재정신청이 기각되면 원칙적으로 헌법소원이 허용되지 않는다. 기각 시 비용은 고소인이 부담한다.)

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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