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송의 드로잉 에세이-벌레와 목수<5>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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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8면

꿈틀벌레 물푸레나무

벌레 입장에서 생각해보자고 애를 써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벌레들이 징그럽다는 사실이다. 나무 속에 사는 벌레들은 대개 곤충의 애벌레들이다. 나무를 갉느라고 발달한 입 주변은 크고 몸통은 짧고 통통하다. 눈ㆍ코ㆍ귀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왜 인간은 벌레를 징그러워 할까

반면 잎에 사는 애벌레들은 생김새가 천차만별이지만 그래도 나무 속 애벌레보다는 봐줄 만하다. 나뭇잎에 올라앉은 벌레들은 나무 속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따라서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벌레들은 변신을 하는데 그 위장과 속임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막대기처럼 생긴 대벌레나 나뭇잎을 닮은 사마귀, 뱀 눈을 닮은 태극나방 등 벌레들은 변신의 귀재들이다.

집 마당 머루덩굴에서 떨어진 벌레를 본 적이 있다. 손가락 굵기만 한 벌레는, 벌레가 아니라 영락없이 머리 부근이 잘린 뱀이었다. 자신을 공격하는 새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 뱀의 형상을 의태(擬態)한 것이리라. 그 모습이 어찌나 정교하게 닮았던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런 의태는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다른 종들과 혼동을 일으킴으로써 생존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함이다.

피라미드의 비밀 은행나무, 단풍나무

그런 벌레들은 때로 귀여운 구석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안전한 나무 속에 숨어 사는 애벌레들은 변신을 하거나 치장할 이유가 거의 없다. 그러니 하나같이 희뿌연 색에다가 주름만 주글주글한 게 영 못마땅하게 생겼다.

벌레가 징그럽다는 것 말고 사람들이 벌레를 싫어하는 이유는 많다. 벌레를 싫어하는 이유의 대부분을 바퀴벌레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바퀴벌레를 퇴치하는 광고들이 부추기듯이, 바퀴벌레는 그 존재만으로도 치명적이다. 굳이 그럴듯한 이유를 찾자면 바퀴벌레가 옮긴다고 알려진 병원균들 때문이다.

그러나 주부들이 바퀴벌레와 함께 산다는 병원균을 직접 본 적은 없다.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고 주장하는 조앤 엘리자베스 록은 바퀴벌레가 의외로 깨끗한 습성을 지닌 곤충이라고 말한다. 바퀴벌레도 고양이처럼 제 몸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핥는단다. 바퀴벌레로서는 매번 부엌을 출입할 때마다 자신의 몸이 얼마나 깨끗한지를 밝혀줄 목욕 증명서를 제출할 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일 테지만, 사람들은 그런 사정을 보아줄 만큼 참을성이 많은 동물이 아니다.

인간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그 불쌍한 벌레에게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그건 말 그대로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존재의 혐오감? 아마 그럴 것이다. 바퀴벌레들은 자신의 몸이 세상의 어느 종자들에게는 징그럽다고 알려진 사실에 대해 치를 떨겠지만, 인간이 한 번 결정한 편견을 뒤집는 것은 억울한 옥살이를 10년 하고 나서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벌레를 두려워함과 징그러워함
바퀴벌레를 징그러워하는 사람이 그의 사촌들을 좋아할 리가 없다. 대부분의 곤충은 더듬이와 여섯 개의 다리와 말랑말랑한 배를 가졌다는 이유로 바퀴벌레의 신세로 전락한다. 곤충들뿐 아니라 곤충과 사돈의 팔촌 정도의 관계도 없노라고 자부하는 거미류나 다지류와 같은 절지동물 역시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들은 모두 벌레이고 벌레는 모두 징그럽기 때문이다.

벌레를 두려워하는 것과 징그러워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많은 사람이 벌레가 두렵기보다는 징그럽기 때문에 멀리한다. 아이들이나 때로 어른조차 벌레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두려움과 징그러움을 구분하지 못하는 감정의 미분화 상태를 말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징그러움의 감정적 포화상태가 공포를 낳는 식의 과대망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벌레에 대해 같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들 벌레를 징그러워하거나 무서워하는 것 같지만 정도가 다 다르다. 환형동물을 지목해 싫어하기도 하고, 발이 많이 달린 것들을 무조건 미워하기도 한다. 또 발 없는 것들에 대한 한없는 증오를 보내거나, 털이 보송보송 난 것들을 미워할 수도 있고, 검은색을 내는 딱딱한 외피를 혐오하거나, 꿈틀거리는 느낌을 주는 피부를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단단한 외피를 지닌 곤충들은 특별히 귀여워하지만 그 곤충들의 어린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한없이 물컹거리는 피부는 참아내지 못하는 부류에 속한다. 동물의 아기들치고 귀엽지 않은 것은 없으나 벌레는 거기서도 제외된다. 벌레의 귀여운 아기가 애벌레라니!

벌레들에 대해 인간들이 느끼는 징그러움 혹은 두려움의 정도와 대상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벌레가 끔찍하다고 확신하는 인간들조차 벌레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일관된 태도를 보이지 못한다. 무섭다는 기준이 다 다르고 징그러운 기준이 다 다르다면 벌레들이 도대체 어떻게 인간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점이 있다. 인간의 벌레에 대한 태도가 통일되어 있지 못하다는 말은 벌레들에 대한 일방적인 혐오감에 개선될 여지가 아직 남아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귀여움과 징그러움 사이
어느 날 마당에서 뛰어놀던 아이가 집 안으로 들어와 엄마에게 선물을 주겠노라고 했다. 손을 내민 엄마의 손에 아이는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물체들을 올려놓았다. 하얗고 빨갛고 알록달록한 물체들은 엄마의 손에서 꼬물거리기 시작했는데 몽땅 벌레들이었다. 너무 놀란 엄마는 아이를 두드려 팼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아이가 혼자 중얼거리며 하는 말이 “얼마나 귀여운데…”였다.

아이는 정말 엄마를 놀라게 하려던 것이 아니다. 그저 한없이 작고 예쁘고 귀여운 벌레들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당이며 밭에는 여기저기 꼬물거리는 벌레들이 잔뜩 있었고 아이의 눈에는 하얗기도 하고 빨갛기도 하며 때로는 파랗거나 노란색으로 알록달록한 벌레들이 정말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아이와 엄마의 문화적 차이는 엄청나다. 아이가 벌레를 집어 엄마에게 갖다 바치는 일은 다시는 없어지겠지만 그 대신 아이는 벌레를 징그러워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아이는 벌레를 징그러워하는 인간에게 대처하는 법을 따로 교육받을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자신조차 벌레를 사랑하는 일이 징그러워하는 일보다 훨씬 이상한 일이란 걸 습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가을이면 딸아이와 논에서 메뚜기를 잡았다. 들기름을 넣고 볶은 메뚜기를 아이는 나에게 나누어주지도 않으려 했다. 맛이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몇 년 전까지의 일이다. 사춘기를 지난 아이는 이제 메뚜기를 볶아 다리 하나라도 먹어보라면 펄쩍 뛴다. 메뚜기뿐 아니라 번데기도 질색한다. ‘어떻게 그런 걸’ 하며 우아를 떤다. 분명 누군가에 의해 메뚜기가 벌레이며 벌레는 혐오스러운 존재이고 그걸 먹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교육을 감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받은 게 틀림없다.

때로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듯 보이는 감정마저 학습에 의한 것이기 쉽다. 인간이 사물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수만 가지의 미묘한 감정 중에서 정말 원초적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사물에 대해 무조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은 너무 확고하고 분명하게 표현되는 것이어서 마치 벌레가 푸른 잎을 보면 무조건 물어뜯는 것처럼 본능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벌레가 징그러운 건 벌레 탓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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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김씨’ 김진송씨는 『현대성의 형성-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를 쓴 근대 연구자,『기억을 잃어버린 도시』의 소설가,『이쾌대』의 미술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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