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송의 드로잉 에세이-벌레와 목수<3>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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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18면

책벌레 2003년 작, 단풍나무 

벌레를 보고 기겁을 하는 인간들의 호들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정말 벌레가 그토록 징그럽고 무시무시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파리와 모기를 내치는 손길만큼 확신에 차고 단호한 결정력을 보일 때도 드물다. 해롭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벌에 쏘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벌이 내는 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서게 마련이다. 통계에 따르면 10년 동안 뱀에 물려 죽은 사람보다 벌에 쏘여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쐐기벌레에 쏘여 피부가 벌겋게 부어올랐던 사람도 벌레가 두려워 풀숲에 가지 못한다. 벌레들은 때로 자신의 몸보다 수십만 배는 더 거대한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토록 벌레를 혐오하게 된 혐의를 벌레에게서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시다시피 체적의 규모와 힘과 능력의 차이를 비교하면 인간 중에서 가장 나약한 아이들조차 벌레보다 수만 배는 더 우월하다. 인간에 의해 죽은 벌레들의 수와 벌레에 의해 죽은 인간의 수를 비교해 보아도 벌레가 훨씬(이 말로는 부족하다) 많지 않은가?

내 머릿속 ‘생각벌레’가 꿈틀거린다

벌레에 대한 경멸의 시선을 거두고 벌레들에게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벌레를 밟지 않기 위해서 성긴 짚신을 신고 벌레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걸음을 옮기는 선승도 있었으며, 다윈의 진화론으로 무장하고 생태학적 고찰이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예시를 통해 벌레와 인간이 얼마나 유사한 생명체인지를 말하는 과학자도 없지 않았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무턱대고 모든 생명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고 강요하는 생명주의의 전도사도 있으며, 인간이란 벌레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고 설파하는 도통한 회의론이나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주장만으로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환원주의적 생명론도 있다. 숲 속의 생활에서 얻어진 자연에 대한 깨달음이건, 종교적 성찰에서 얻어진 믿음이건, 과학적인 접근에서 도달한 생태학적 진실이건 그 모두의 귀결점은 자연에 대한 경외와 그 앞에서의 겸손함으로 끝을 맺게 된다.

한갓 미물인 벌레에 대한 애틋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어서 그 결과 이제는 벌레조차 생명의 고귀한 숨결을 지닌 존재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교육에 힘입은 바 크다. 초등학생들은 딱정벌레를 굼벵이 시절부터 길러내는 갸륵함을 보이기도 하고, 『파브르 곤충기』를 열심히 읽은 덕에 자라서 벌레의 삶에서 지혜를 빌려오려는 어른들도 없지 않다. 살아있다는 것을 기적처럼 바라보는 것은 훌륭한 생각이다. 적어도 생명에 대한 존귀함이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인간에겐 매우 긍정적인 도덕률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모든 생명체에 대해 경외감을 갖는 것은 아니다. 벌레가 생명을 지닌 존재로 부각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벌레에 대한 자비가 무한히 늘어나지는 않는다. 아무리 벌레가 친근해졌다고 해도 기생충에게 자비를 베풀 인간은 드물다. 벌레에 대한 사랑도 정도가 있다. 더욱이 인간의 병을 일으키는 무수한 바이러스들은 인간의 새로운 주적(主敵)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경외감을 갖는 생명체를 철저하게 선택해왔다. 인간에게 선택되지 못한 생명체의 존재의 슬픈 역사는 매우 길다. 그들을 부르는 가장 오래된 말이 벌레일 것이다.

벌레에 대한 경멸과 생명에 대한 겸손 사이를 인간은 오락가락한다. 벌레에겐 슬픈 일이지만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란 인간이 자연을 소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은 인간의 이익에 충실하기 위한 도덕률이다.

벌레와 나
벌레는 나에게도 이율배반적인 존재였다. 한편으로는 끔찍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좋아한다. 벌레는 나에게 모든 문제의 중심에 놓여 있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나는 일에 지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혹은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꼼지락거리며 집요하게 나무를 갉아대는 벌레처럼 일해야 했다. 새로운 목물을 만드느라 생각을 쥐어짜거나 스케치를 할 때도 나는 벌레가 되어야 했다. 벌레들은 내가 애써 구해 작업실 한쪽에 쌓아놓은 나무 속뿐 아니라 나의 머릿속에도 꿈틀거리며 기어들어왔다.

몇 년 전에는 정말 많은 벌레를 만든 적이 있다. 대부분 나무로 깎아 만든 것들인데 그런 벌레들을 목수인 내가 만들 이유는 없었다. 단지 나무로 만들 무엇인가가 벌레였을 뿐이다. 아무 데도 소용이 닿지 않는 벌레들을 만들고 거기에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사건에 벌레를 등장시키곤 했다. 벌레의 눈을 통해서 보면 자연과 사물과 인간의 현상과 구조가 달라 보였다. 벌레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하는 인간의 세상이 거꾸로 벌레에 의해 모순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벌레의 눈으로 보자면 인간이 하는 일이 영 마뜩지 않다. 말로는 그럴듯하게 떠들지만 죄다 자기들 잇속 챙기기에 골몰한다. 인간과 같은 종족인 나 역시 그렇게 말하는 벌레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느새 벌레는 나의 감시자가 되었다. 혼자 작업을 하면서 가끔 중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누가 보면 미친 짓거리처럼 보이겠지만 그런 나를 상대해준 게 벌레였다. 일을 하다 막히거나 잠시 만든 물건을 가늠하기 위해 손을 놓을 때면 벌레에게 말을 걸곤 했다. 어때? 마음에 드는 것 같아? 그만하면 쓸 만한 물건이 되지 않았어?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타박이 돌아오곤 했다. 글쎄. 균형이 좀 맞지 않잖아? 그것도 물건이라고 만들다니! 벌레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벌레에게는 나의 약점이나 모순까지도 숨길 수 없었다. 나에 대해 그렇게 대놓고 빈정거리거나 조롱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벌레였다. 나는 벌레에게 그런 자격을 부여했다.

그 후로도 직접 말하기가 곤란하거나 쑥스러운 일들이 있을 때마다 나는 벌레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곤 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상한 생각들을 말하고 싶으면 “생각벌레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라고 눙치거나 자동차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철갑충에 대해 들어봤어? 거기에 기생하는 동물이 있다던데”,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긴 생각벌레가 온통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니 모든 걸 벌레 수준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긴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나는 벌레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에게 벌레란 여전히 혐오스러운 존재에 불과했고 관념 속에서만 친근한 존재였다.

수없이 죽어나간 벌레들을 애도하기 위한 갸륵한 심성에서는 아닐지라도 경쟁자에 대한 예의에서 벌레들을 생각한다. 벌레들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곤충의 애벌레들이다. 그들은 찬란한 미래를 위해 고난의 오늘을 묵묵히 준비하는 은둔자들이다. 그러나 애벌레, 이름 하여 유충은 성충이 되기 위한 전 단계의 유보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억압 혹은 계급차별이나 문화적 우월감을 강요하기 위한 교육적 장치로 인간을 제외한 주변의 자연적 현상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곤 한다. 혹은 성공에 대한 환상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벌레들을 미숙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부각시킨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말하려는 것처럼 애벌레들이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해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며 인내하는 존재만은 아니다. 벌레들은, 인간들이 제 입맛대로 판단하듯이, 그 자신이 하나의 완전한 생명의 과정일지언정 무엇이 되기 위한 예비적인 불완전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

고도의 지능을 가진 인간들은 자신의 본질을 사물이나 눈앞의 대상에 전이시키는 데 능숙하다. 이를테면 하찮은 자신을 보고 벌레 같다는 비유를 함으로써 아무런 잘못도 없는 벌레를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악스러운 인간은 벌레가 아닌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유라고 우길 것이지만, 덩달아 하찮아진 벌레를 하찮은 무엇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럴 때 인간의 언어는 간교할 뿐 아니라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소통의 도구다. 그러니 벌레를 벌레로부터 해방시키는 일 역시 아직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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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김씨' 김진송씨는 『현대성의 형성-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를 쓴 근대 연구자,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의 소설가, 『이쾌대』의 미술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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