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에 매달린 인생은 서커스-QUIDAM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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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14면

서커스 쇼를 극적으로 녹여낸 퍼포먼스 39퀴담39의 명장면들. 절정의 묘기와 더불어 인간 몸의 아름다움이 찬사를 불러일으킨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나 현대무용 장면들을 연상케 한다. 사진 구본창. 

캐나다 공연기업 ‘태양의 서커스’가 한국에 선보인 ‘퀴담’(Quidam, ‘익명의 행인’이란 뜻의 라틴어). 애써 장르를 구별하자면 서커스다. 하지만 서커스는 양념이다. 넌버벌 퍼포먼스(비언어 행위예술)다.

‘퀴담’은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보디랭귀지로 할 말 못할 말 다 한다. 한계가 있는 건 우리의 상상력이다. 인간의 팔은 짧지만, 손끝이 저 너머 세상을 가리킬 때 팔의 길이는 저 별까지 연장된다.
‘퀴담’은 서커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어버린다. 2시간짜리 장막극이다. 고난도 기예를 한갓 놀이와 에피소드로 만든다. 등장인물들은 다 배우다. 그들은 묘기가 아니라 연기를 펼친다. 그 연기는 노동이 아니라 놀이다.

우리가 공설운동장에서 보았던 서커스는 이랬다. 영화 ‘패왕별희’의 한 대사였던가. “얼마나 맞았기에 그렇게 잘할 수 있을까.” 광대의 개인기에는 혹독한 수련과정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보기에 안쓰러웠다. 지옥훈련으로 단련된 육질(肉質)들의 곡예는 감동을 반감시켰다.

반면 ‘퀴담’은 개인기를 스토리 속에 녹여낸, 잘 빚은 드라마다. 매 장면과 모든 몸이 아름답게 연출된다. 곡예의 난이도에 대해서는 깜빡깜빡 잊게 된다. ‘매직 리얼리즘’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정직한 몸으로 환상적인 마술을 펼쳐 보인다. 부자유스러운 관절과 근육을 상상력으로 해방시키고 있다.

공연장소는 천막극장이다. 무대와 객석이 한 뼘 사이다. 여배우가 한 손 물구나무 서기를 한다. 온몸의 무게를 지탱하는 오른팔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여배우의 팔은 지진 속에서도 직립한 거대한 뿌리다. 남자배우는 그의 어깨 위에 세 사람을 4층 높이로 무동 태웠다. 그는 숨조차 멈춘 것 같다. 하지만 복식호흡 하는 그의 배(腹)는 조심스럽게 부풀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에어리얼 컨토션 인 실크(Aerial Contortion in Silk)’는 어떤가. 무용수는 공중에서 내려온 붉은 실크와 한 몸이다. 공중에서 생로병사를 다 보여준다. 붉은 자궁 속 태아였다가, 붉은 고치집의 누에였다가, 붉은 요람 속 아기였다가, 붉은 무덤 속 주검이었다가, 붉은 기적 속의 부활이 된다. 이런 장면 하나하나가 그림이다.

동작을 한 컷에 요약하고, 그 한 컷에 동영상처럼 이야기를 담는다. 이야기 속에는 숲도 있고 계곡도 있게 마련이다. 결정적인 한 방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슬픔과 기쁨, 빠름과 느림, 긴장과 이완을 다 품고 있다.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고 팔짱을 꼈다가도, 하도 잘해서 껄껄 웃음이 나온다. 한 줄기 붉은 실크에 몸을 맡긴 인간 거미도 날고 싶은 꿈과 추락하는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이야말로 그러한 희비극의 서커스가 아니던가.

발레는 움직이는 조각이다. ‘퀴담’은 인간 모빌이다. 몸이 희로애락을 보여준다. 벗은 몸과 실루엣이 외설스럽지 않다. ‘퀴담’은 공연예술의 새로운 장르를 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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