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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을 것 없다” 4대 그룹 방관 속 총수들 입장따라 四分五裂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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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04면

지난달 27일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총회에서 3970대 불가론39을 주장한 이준용(69) 대림 명예회장(왼쪽)과 조석래 (72) 효성 회장이 대화를 하고 있다. 

조석래 전경련 회장을 뽑는 과정에서 기업인들이 각자 의견을 앞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편이 갈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전경련 회장을 서로 하겠다고 다툰 게 아니라 ‘누구는 하면 안 되고 누구는 된다’며 공방(攻防)을 벌였기 때문이다.

전경련 회장 선출갈등

평소 두 겹, 세 겹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대기업 총수들. 하지만 그들 사이에 갈등이 이번 회장 선출처럼 여과 없이 실시간으로 노출된 때는 없었다. 재계 입장에선 그야말로 ‘사태’다. 단순히 일부 회장이 벌인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게 재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두 달 가까이 지속된 전경련 회장 선출 과정의 갈등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 재계의 위상과 함께 달라진 정부-재계 관계, 기업 간 경쟁 판도를 읽을 수 있다. 어쨌든 재계가 이번 사태로 4대그룹, 원로그룹, 후보물망그룹, 불만그룹, 소장그룹 등 ‘5개 그룹’으로 나눠진 국면이다. <그래픽 참조>

우선 전경련의 ‘대주주’ 격인 4대 그룹은 ‘전경련이라는 오너 클럽’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하다. 삼성·현대차·SK·LG 등 이미 글로벌화한 대기업들은 전경련에 적극 관여해 봐야 정치적 부담만 클 뿐 얻을 게 없다는 계산이다. 이건희(65) 삼성 회장은 전경련 회장직 제의를 이미 여러 차례 거절했다. 구본무(62) LG 회장도 2000년 이후 여의도 본사와 가까운 전경련 회관에 얼굴을 거의 내밀지 않고 있다. 정몽구(69) 현대차 회장은 지난해 비자금 사건 등 경영 악재를 헤쳐나가느라 외부 일에 신경 쓸 여력조차 없다. 최태원(47) SK 회장도 차기 회장 선임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난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들 4대 그룹은 이미 전경련을 통하지 않더라도 정부와 1 대 1 대화가 가능한 상황”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세계시장에서 선전하는 개별 기업에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대기업의 모임은 부정적으로 보는 국민의 시선도 영향을 줬다.

이같이 4대 그룹이 손을 놓자 전경련은 중견기업들의 ‘성토장’으로 변했다. 전경련이 그만큼 무기력해졌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전경련의 힘이 필요한 곳은 바로 이들 중견기업이다. 외환위기 이후 재계 내부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난 탓에 이들과 상위 그룹 간 격차는 크게 벌어졌다. ‘정부를 향해 제 목소리를 못 내는 허수아비 전경련’에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이준용 대림그룹 명예회장이 본인 표현대로 ‘악역’을 도맡았다. 지난달 27일 정기총회에서는 ‘70대 불가론’으로, 20일 조석래 회장의 취임 석상에서는 자필로 쓴 8장의 유인물과 관련 신문 스크랩을 돌리며 그간의 행적을 해명했다.

회장들의 말을 중심으로 두 달간의 전경련 회장 뽑기 진통을 재구성해 보자.
1월 25일 이건희 회장의 초청으로 신라호텔에서 회장단 만찬이 열렸다. 대안 부재를 이유로 전경련 측에선 사전에 이 명예회장 등에게 강 회장의 연임을 수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건희 회장도 이 자리에서 강 회장에게 “건강이 허락하면 한 번 더 하시죠”라고 권유했다. 당시 강 회장도 “건강은 문제없다”며 그 자리에서 수락 의사를 비췄다. 그러나 이를 ‘과도한 집착’으로 본 이준용 명예회장은 “어떻게 하든 강 회장의 3연임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이 명예회장이 미처 나서기 전에 ‘총대’를 멘 사람은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었다. 강 회장이 외부에 3연임 의사를 넌지시 표시할 즈음인 2월 초 김 회장이 전경련 부회장 사퇴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사퇴의 변은 “그동안 전경련의 혁신과 변화를 주장했는데 받아들여진 것이 없었다”는 것. 이에 대해 재계의 한 관계자는 “김 회장은 평소 관료 출신의 상근 간부들이 고령의 회장을 등에 업고 전경련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이준용 명예회장과 비슷한 불만이다.
결국 강 회장은 공식적으로 3연임 의사를 접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강 회장이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는 게 이 명예회장의 주장이다. 심지어 조석래 회장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던 27일 총회 때까지도 그랬다는 것이다. 이날 그가 주장한 ‘70대 불가론’도 사실은 강 회장을 겨냥했던 셈이다.

이 명예회장은 또 20일 총회도 사무국 측에서 2주가량 늦추려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29일 동아제약 주총을 감안해 강 회장이 그때까지 전경련 회장직을 유지하게 해주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김준성 고문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이 시도는 결국 불발됐다는 것이다. 그는 강 회장이 3연임을 완전히 포기한 것을 확인한 게 총회에 앞서 열린 19일 회장단 회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 회장에게 “이제 미련을 떨치고 쉬시라. 이것이 가까이 모셨던 몇몇 부회장들의 고언”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강 회장을 중심으로 한 원로그룹과 사무국에 대한 반발이 단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강 회장과 이 명예회장을 축으로 한 갈등 외에도 자천타천으로 회장 후보가 거론되면서 기업 간 갈등 구도가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했다. 특정 후보에 대해 ‘된다, 안 된다’는 공방으로 좀처럼 만장일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내심 회장직에 관심이 있는 후보들도 거부될 것을 우려해 공개적으로 나서기를 꺼렸다. 조건호 상근 부회장은 이를 암시하듯 회장 추대가 무산된 지난달 27일 기자회견에서 “회장직 의사를 보였거나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복수의 후보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70대 불가론’도 본의와 달리 재계에 세대 갈등을 촉발했다. 강신호 회장은 “너무 젊어도 문제”라며 즉각 반발했다. 여기에 이건희 회장도 “나이가 아니라 실력이 문제”라고 거들었다. 현재현 동양 회장 등 50대 젊은 총수로 옮겨가던 무게중심은 급격히 다시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노소(老少)뿐 아니라 ‘창업 세대’와 ‘후계 세대’ 간의 인식 차이도 재계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 해외 유학파 출신인 2, 3세 경영인이 많다 보니 기존의 창업세대와는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이화여대 이지환(경영학) 교수는 “기업인 간 친소관계뿐 아니라 자수성가형 경영인과 2, 3세 경영인이 뒤섞여 창업주 중심으로 구성됐던 전경련이 예전처럼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힘들어졌다”고 진단했다.

문제는 새 회장 선출 이후로도 갈등이 완전 봉합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조석래 체제를 두고 실세 회장 영입에 실패한 전경련을 또 한번의 ‘과도기적 체제’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실세 회장론’조차 난센스라고 지적한다. 근본적으로 전경련이 시대변화에 맞춰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외환위기와 시장 개방으로 기업들 사이의 협력보다 경쟁이 일반화됐고 이해관계도 다양해졌다. <14p 그래픽 참조>

거의 모든 그룹이 글로벌 경영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우물 안 단합’을 이루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의미도 없다는 얘기다. 공무원으로서 전경련에서 1년간 파견근무를 했던 신제윤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은 “대기업을 아우르는 소규모 행정조직은 남겨두면서 재계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싱크탱크로 거듭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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