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작가가 쓰는 대선 주자 ‘他敍傳’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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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07면

대필 작가의 이름도 없는 한국 정치인들의 자서전. 대필 작가들은 유령처럼 소문만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대통령 선거 주자들의 자서전이 하나 둘 나오고 있다. 곧 쏟아질 태세다. 대선 주자들의 자서전 출간은 선거의 계절을 알리는 제비. 출판기념회와 책 광고를 통해 세력을 과시하거나 ‘합법적 사전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홍보용 책자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유령 작가(ghost writer)도 함께 뛴다. 남의 책을 대신 써주는 작가는 흔히 대필 작가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필 작가는 흔적이 없다. 소문만 남긴다. 대필 작가가 유령 작가로, 자서전이 타서전(他敍傳)으로 전락하는 배경이다. 선진국의 정치인 자서전은 대필 작가의 이름을 최소한 책 날개나 머리말에서라도 명백히 밝힌다. 이래저래 대필 작가의 실명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때다. 정치인 자서전의 품질을 높이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유령 작가는 정치가와 대필 작가, 그리고 유권자의 요구가 합쳐져 태어난다. 정치가는 자서전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저자가 되고 싶다. 대필 작가는 원고료가 필요할 뿐 자신의 저서 목록에 포함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정치인에게 두루 능통한 능력을 기대한다. 분초를 쪼개 쓰는 정치인들이 내가 썼다고 우길 수밖에 없는 구실을 만들어준다.

1992년 한 대선 후보의 자서전을 쓴 소설가 A씨는 아직도 그 사실이 드러날까 두렵다. 집필 사실을 감추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돈을 벌기 위한 일종의 매문(賣文)이었다는 자의식과 거짓말이 즐비한 ‘주례사’였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가의 책은 대개 표지 사진과 성장 시절 이야기 빼고는 다 똑같은 위인전이라고 했다. 정치인은 자신의 삶이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그려지기를 주문한다는 설명이다.

현재 어느 대권 후보의 책에 깊숙하게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소설가 B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치인 캠프에서 이미 쓴 원고에 손을 봐주는 정도라고 주장했다.
실제 역대 대통령과 대선 후보 자서전의 경우 작가들의 이름은 유령처럼 떠돈다. 어느 작가는 대필료로 1억원을 받았다든가, 어떤 작가는 백과사전 출간비를 지원받았다는 등 확인하기 어려운 소문이 무성하다. 다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서전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쓴 소설가는 대필 사실이 알려지면서 작가 인생에 큰 시련을 겪었다.
소설가가 아닌 사람이 대필했을 경우엔 이름이 드러나기도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낸 자서전 『국가와 혁명과 나』의 대필자는 박상길(청와대 대변인 역임)씨다.

‘정치인 전문작가’ 김대우씨는 정치인 자서전 대필을 포함해 15종에 이르는 정치인 책을 쓴 베테랑. 그는 “대선 캠프에서 펴내는 자서전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므로 특정한 필자의 이름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면서도 “작가의 이름을 숨기는 것은 우리의 정치인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씨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정치인 전기 작가들이 가장 많은 원고료를 받는 일급 작가들이다. 그들의 이름이 자서전에 표기되는 것은 물론이다. 전기 작가가 자기의 명예를 걸고 쓰는 만큼 염치 없는 미화는 드물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인 자서전은 대체로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임기 또는 은퇴 후가 아니라 선거 전에 나오는 데서 빚어지는 불구(不具)다. 사실상 출마자의 선거운동 용도다. 책으로서는 함량 미달인 게 흔하다.

대선 후보의 자서전을 쓴 경험이 있는 소설가이자 문화기획자인 서해성씨는 고백록과 회고록의 문화가 빈약한 우리 현실에서 정치인 자서전은 대개 홍보 책자라고 단언했다. 서씨는 “현역 정치인이나 정치 지망생의 자서전보다는 김종필 같은 정치가의 회고록이 나와야 정치인 저술 문화가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런 원죄 때문에 독서시장의 반응은 차갑다. 밑줄 치며 읽는 독자는 주로 저자에게 줄을 서려는 사람들이다. ‘참회록을 써야 할 사람들이 웬 자서전’이라는 빈정거림도 나온다. 소설가 이기호씨는 ‘대필의 추억’이라는 글에서 고백한다. “내 의뢰인(자서전 대필 의뢰 정치인)들은 거의 대부분 구속 수감되었다.”

출판사로서는 정치인 자서전이 ‘뜨거운 감자’다. 들녘의 이정원 대표는 회고록이나 평전이라면 몰라도 선거를 앞둔 시점에 내는 정치인 자서전은 거절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이 대표는 덕분에 여러 출간 제의를 물리칠 수 있어 마음고생을 덜었다. “실제 아주 친한 친구의 책도 큰 부담 없이 사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출판사의 이미지 관리에 불리하다는 판단에서다.

현재의 대선 주자 등 정치인 다섯 명의 자서전을 펴낸 은행나무의 주연선 대표는 “저자 측이 어느 정도 구입을 보장해 주므로 군소 출판사에서는 출간 제의를 뿌리치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또 “저자가 만족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쳐 책을 내므로 그 수고에 비하면 생각보다 큰 수익이 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각종 선거를 앞두고 자서전이 떼 지어 나타난다. 말릴 수도 없다. 정치적 야망과 대권 의지는 합법적인 모든 수단을 끌어들이므로 그렇다. 다만 정치인들이 대필 작가의 이름을 책에 쿡쿡 박고, 훗날 회고록도 내면 좋겠다는 게 뜻있는 사람들의 소박하고도 공통된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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