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대비가 빚어내는 아날로그의 기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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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31면

쾌적한 사무환경을 위해 온ㆍ습도계가 필요해졌다.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살 수 없다. 벽에 걸어놓고 항상 보게 되는 물건이므로 기능을 넘은 아름다운 물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활의 질은 촘촘하게 디테일을 채워가는 일로 세련을 더한다. “뭐!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따지며 유별을 떠느냐고 빈정거린다면 아무 짓 하지 않고 살면 된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바리고( BARIGO ) 온ㆍ습도계

쓸 만한 온ㆍ습도계를 찾아보기로 했다. 정보는 넘치지만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선 열심히 발품을 파는 방법이 최고다. 정보와 실제의 간극은 실제 확인하기 전엔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다.

온ㆍ습도계라 하면 익숙하게 보아온 알코올이나 수은 방식을 떠올리게 된다. 오랫동안 보아 질린 이런 기종은 관심에서 제외다. 대체품은 전기식, 적외선 흡수식, 흡습성(吸濕性)을 지닌 염화리튬의 전기저항 변화를 디지털로 표시해 주는 방식의 온ㆍ습도계가 나와 있다. 작고 앙증맞은 디자인과 온ㆍ습도를 숫자로 바로 표시해 기능은 혀를 내두를 만했다.

작동 방식이야 어떻든 마음에 드는 개성적 디자인과 편리한 표시 기능을 양립시켜야 한다. 쓸 만한 온ㆍ습도계를 찾아냈다. 독일 바리고 ( BARIGO )사의 제품인데 바이메탈 코일로 지침을 표시하는 아날로그 방식이다. 한 몸체에 온ㆍ습도계를 동시에 담은 기능성과 검정 침과 백색의 문자판이 만드는 간결한 대비의 디자인에 매료당했다.

좋은 물건은 마치 연인처럼 스치듯 다가온다. 황학동 벼룩시장의 먼지 쌓인 물건 더미 속에 처박힌 바리고는 세련된 자태를 내게만 보여주었다. 물건의 임자는 따로 있는 법이다. 바리고를 찾아낸 것은 필연적 우연이다. 대수롭지 않은 듯 주인과 흥정을 했고 말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묵은 때 벗겨낸 바리고는 격조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발산하기 시작했다. 검정 알루미늄 경통 안의 흰색 문자판은 아라비아 숫자와 정갈한 눈금만 찍혀 있다. 그 정밀함은 독일산 기기의 특질을 그대로 보여준다. 좌우의 온ㆍ습도계 지침은 교차돼 움직인다. 온도와 습도의 상대적 양은 지침의 교차 각도로 한눈에 들어오도록 배려한 것이다. 측정기란 건조한 용도의 물건에 미적 감각을 더한 센스는 훌륭한 공예품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세월이 흘러 프랑크푸르트 공항 면세점에 진열된 똑같은 바리고를 보았다. 그때의 반가움이란. 근 십 년 이상 나의 바리고는 단종되지 않은 채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격표엔 꽤 비싼 값이 붙어 있다. 바리고의 진가는 속물적 가치기준으로 확인된 셈이다. 바리고는 생활의 향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사갈 것이다. 좋은 물건은 시공을 초월하는 힘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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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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